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된 것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어머니의 고된 노동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나의 무력과 무능이 있다. 불효가 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함민복의 시가 있다. 그리고 이 시에 이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김훈의 문장이 있다.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알에서 태어나고 싶다. 부모를 버려두고 날아가고 싶다. 부모를 '다려 먹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맛이 없어서다. 밥벌이보다 지겨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핏줄이 아닐까.


어머니를 다려 먹었습니다

맛이 없었습니다

-<섣달 그믐>


난생하는 것들의 자유는 낳은 자와 낳음을 받은 자 사이의 괴롭고도 무거운 관계를 세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무리지어 퍼덕거리면서 세계의 가장 자리에서 가장 자리로 옮겨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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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친구와 여러 차례 메시지를 주고받을 일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하늘이 이쁘다'라는 문구로 마지막 메시지를 대신하는 친구다. 그럼으로써 오전에 비가 왔다가 지금은 그쳤다는 사실과 그 예쁘다 못해 이쁜 하늘을 나는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우쳐주는 친구다. 그 친구는 그런 친구다. 사실 한국 남자가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은 죄다. 마흔이 코앞인데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은 더욱 죄다. 남편이자 가장이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은 더더욱 죄다. 하늘이 이뻐 보이는 것 보다 더 큰 죄는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친구는 어려서부터 지은 죄가 많았다. 그러고도 잘 살고 있으니 대견하고도 부러운 일이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한다. 어려서는 지은 죄가 많은 것이 나와 닮은 것 같아 좋았다면, 지금은 그 많은 죄를 짓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에 좋다. 그 친구 덕분에 때맞춰 이쁜 하늘을 볼 수 있으니 내겐 큰 복이다. 친구여 오래 곁에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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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투덜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투덜이로 불리고 있다. 대학 입학 후 투덜이임을 숨기고 살 생각이었으나, 몇 달 만에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일종의 아웃팅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로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철없던 시절에는 세상사에 딴지를 걸며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비판을 내놓는 것을 자랑 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악취미였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 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나의 투덜거림에 상처 받았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INTP다. 특히 I와 T 수치가 아주 높은 편이다. 언제나 행동 보다 생각이 앞선다. 아니, 절대적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 많은 생각들을 언제 다 행동으로 옮길 지 나 자신조차도 짜증스럽고 지겨울 때가 있다. 물론 이것도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간해서는 인간관계에서 잡음을 만들지 않는다.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예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부끄럼쟁이 샌님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악마를. 생각이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겁한 일인가? 또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예단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렇다. 나는 비겁하고도 오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누가 내 허벅지를 두고 두껍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 신체 부위 중 두꺼운 곳이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거울을 보니, 과연 상체에 비한다면 하체는 그럭저럭 봐 줄 만 했다. 상체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초등학교 3학년생의 몸매였다. 몇 년 전부터 더위보다 추위를 더 타고 있다. 전에는 반대였다. 여름이면 줄줄 흐르던 땀도 이제 별로 나지 않는다. 재작년 겨울에는 난생 처음으로 자다가 추워서 깨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고생을 했다. 자연스럽게 먹는 양이 줄었고, 살도 좀 빠졌다. 전에도 내가 소음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요즘 그것을 몸으로 직접 실감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덤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대견한 다짐도 하게 되었다.


나는 소음인이다. 나는 INTP다. 나는 투덜이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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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여경기 일정이 발표될 때부터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마지막 경기가 그 팀과의 경기란 말인가. 그 경기는 이미 전설인 선수의 은퇴 경기가 될 것이기에, 나는 그대들이 남의 잔치의 들러리가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대들과 라이온즈의 가을야구는 좌절된 상태, 그날의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러한 경기를 보고 싶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경기 결과와 함께 그날 주인공과의 정면승부를 택한 그대들의 선발투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올해 그대들의 야구는 실패라고 할 것이나, 그것으로 되었다. 내가 그대들을 응원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대들에게 한 수 배웠다. 회피와 유예로 점철된 나의 지난날을 후회하며 이 전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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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자네는 언제나 내게 예스맨이었다.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나의 실수에 늘 관대했으며, 심지어 나를 걱정하고 위로할 때도 많았다. 자네는 본성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어제 자네와의 술자리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선배보다 동기나 후배와의 관계가 편했다고 회상했고, 자네는 그 반대였다고 대답했다. 나는 말로만 예스맨을 미워하는 위선자임이 분명하다. 이 말을 자네가 들었다면 '형은 위선자 아니에요'라고 했을 것이다. 어제 그런 자네에게 내 많은 치부 중 몇을 드러냈고, 자네는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자네는 예스맨임이 확실하다.


자네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보다도 훨씬 반가웠다. 특히 자네의 연애 소식이 그러했다. 변변한 연애 경험이 없는 내 생각에도 연애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대학시절 나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는 못난이였다. 결핍을 모르니 사랑을 모를 수밖에. 최근 밀려오는 수많은 후회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앞으로 자네의 연애사업이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여자 친구에게 자네가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주라고 권하고 싶다. 손에 쥔 것 중 하나를 내려놓아야 다른 하나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화투의 교훈 아니던가. 생각하면 나는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멍청이였다. 하나쯤 내려놓아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의 실패담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어제 술자리에서 잠깐 현실감각이란 말이 화두가 되었었다. 자네나 나나 현실감각이 뛰어난 청년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네도 조금씩 생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네의 입에서 집값과 월급,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다소 어색한 단어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과거에 어색했던 단어들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당연한 일을 하지 못해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자네가 생활인이 되어 감을 보면서 스스로 불편해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아가 자네가 거기서 행복을 느끼기를 바란다. 지금 자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적고 보니 늘 우울하면서도, 진정한 생활인이라 할 수 없는 내가 끼적이는 또 하나의 실패담이 되고 말았다.


자네와 내가 같은 고등학교를 2년 동안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어제 내가 자네에게 드러낸 치부도 이와 같을 것이다. 너무나도 명백한 것을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나만 몰랐던 것이다. 그 결과는 이렇듯 후회와 실패담의 연속이다. 어쩌면 나는 예스맨인 자네에게 실패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뜬금없이 자네를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의 술자리에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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