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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글, 장철영 사진 / 바다출판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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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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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역사와 문명 속에서 가장 쓸데없는 행위와 행동들이 바로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란 것은 인간을 서로 붕괴하고 망치고 이때까지 노력한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린다. 그 모래성도 성난 파도가 몰아치는 태평양 중앙에 위치한 작은 암초에 세운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사라지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전쟁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정치적인 업적에서 주요 이벤트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아니한가?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 어차피 패자들에게 기억해줄 이름 따위가 없는 세상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 역사 곳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과 시간 속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딱히 그렇다고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패자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하다못해 그들과 조금이라도 연이 닿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승자의 기록이 아닌 패자의 기록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전쟁의 역사와 패자의 역사, 그리고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 전쟁, 한국전쟁은 패자들의 기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쟁 후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체로 이루어진 들판과 산하, 그리고 부서진 건물잔해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공간에서 지금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나, 한편으로 불안하다. 세상에는 과도기라는 존재하는데, 우린 그 과도기가 너무 짧았으며, 그 과도기 속에 충분히 통과의례로 봐야할 것들이 너무 미비했다. 나는 지금도 한국사회는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잊어버린 전쟁이라던 625사변 즉 한국전쟁이라고 하나, 아직도 한국인의 무의식적인 공간에는 공포와 적대심이란 것이 남아있다. 해방 전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서 직접 겪은 사람과 더불어 그들의 직계 후손이 아직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에서는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이라고 표지에 그려져 있지 않은가? 한국전쟁은 정말 끝나지 않았다. 단지 휴전된 상태로 화약고에 점화가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위기감만 계속 맴돌고 있다.

 

최근 북한정치계의 변화와 세계사회의 탈(脫)이데올로기로 통한 더욱 더 견고한 이데올로기적 행동, 유가상승과 에너지고갈, 환경오염 등 이 모든 세계적인 변화, 거기에 맞춘 한국의 외부에 대한 변화 내지 내부 자체의 변화는 여전히 한국사회가 어지럽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결국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역사를 알아야 결국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와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방향이 보인다. 예전에 <철학,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이란 책을 보았는데, 역사학과 철학은 조금 다르나, 기본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과거를 보고 앞을 생각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고 말이다. 철학에서는 그 문제의 해결을 바로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 문제의 원인, 즉 문제 자체에 대한 답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본다면 어느 철학자 말처럼 철학은 철학에 대해 생각해서 철학적이기보다는 그 행동으로 통해 하나의 실천의지가 있어야 철학적이란 문구가 생각난다. 게다가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과학이란 지식이 존재해야 한다. 철학의 사유는 논리가 필연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 사고로 통한 논리적 판단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절실할 것이다.

 

물론 칸트가 말한 것처럼 논리라는 것은 윤리라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윤리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도 역사 속의 사실에서 우리는 윤리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단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길 앞에서 윤리적 가치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는 윤리적 시선보다는 논리적 시선에 가깝다. 사료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저술된 점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특히나 일방적으로 누구의 입장보다는 당시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로 통해 복원했다.

 

한국전쟁을 연상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대부분 사진과 간략한 연표정도일 것이다. 그 당시 어느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어떤 방향으로 갔는지 대해선 잘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오해와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런 문제를 잘 간파했는지,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판단을 당대의 문헌과 기록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국내보다는 남한 측의 전시작전에 큰 기여를 한 미군정과 미국정부의 자료, 그리고 북한 측에 있었던 소련에 대한 자료였다.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로 전환되자, 러시아 전쟁기록물에 보관된 전쟁기록의 등장은 매우 신기했다. 그만큼 신빙성이 보인 자료가 객관성을 보이는 자료가 등장한 것이다. 이때까지 그저 우리는 재구성된 자료로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여기의 자료와 기록물은 그 가치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전쟁의 원인을 찾자면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왜 전쟁이 되어야 했고, 왜 1950년 6월 25일이어야 했으며, 또 1953년 7일 27일에 휴전 협정을 맺어야 하는 가이다.

 

단순히 했다고 했지 그 뒤에 숨은 이야기는 모른다. 또한 무슨 이유로 발발했는지 까지 생각하면 말이다. 친일파 문제부터 시작하여 북한 측의 공작, 이승만의 자기 독단, 비리와 부정, 미군과 소련, 유엔의 결정 등을 말이다. 그런 부분에서 가장 인상 남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에 상당히 교우가 좋고 협력적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틀렸다는 점이다. 오히려 미군정은 전쟁의 의한 물자 및 인원 소모와 내부 정치적 입지로 피곤하고 지쳤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몰래 이승만을 정치적인 숙청을 계획에 많은 놀라움을 주었으며, 미국이 전쟁에 그렇게도 적극적 의지가 없음에도 이승만의 북진을 추구하는 점에서 그의 지도력이 정말 의심스러웠다. 임시정부 수립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원조를 받던 그가 어느덧 미국과 차질을 빚는 모습을 말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분명하고 견고했으나, 적어도 이들은 필사적이지 않았다. 당시 2차 세계 대전 후의 두 진영의 정치적 파워에 집착했었지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독립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한국의 독립에 중요성을 안 것은 당시 참전한 중하급 장교와 사병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참전해서 죽음으로 한국의 자유를 지켜내었으나, 그 가치를 이승만이 거침없이 무시한 점에서 의외의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것이 일방적인 내용이 아니라 미국 자체의 공문서 보고라는 점에서 말이다. 미군의 젊은 군인들은 자유의지라는 가치로 참전해었을지 몰라도 미국이란 정부는 그렇지 못함은 절실히 나와 있었다. 아니 소비에트 연방의 무서운 독재자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보는 그의 정치적 판단은 매우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라 오히려 조바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종료 시까지 독일 나치와 전쟁을 벌인 소련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에 직접적 물자투입은 힘들었고, 게다가 전쟁직접 지원국이 된다면 국제적인 정치외교 입장이 매우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점을 중국의 모택동의 중국 공산화 성공과 더불어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들을 북한에 다시 복귀하여 강한 군사력으로 키워 남한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그리고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전에 1949년에 이미 황해도 일대에는 전투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은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았다.

 

단지 1950년에 전쟁으로 서울수복과 낙동강전선에 이르는 불리한 전황에서 순식간에 전투가 아닌 정치적 무력항쟁인 전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가 군대 출신이 공군이다. 미국이 에치슨 선언이후 미군을 다 철수했어도,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에 있던 미공군이 전쟁 발발 후 제일 먼저 대구에 도착한 사실에 의아해 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공군이 제대로 된 군사조직이 아니었다. 공군에 사용되는 항공기들이 해군 항공모함 내지 육군기지로 의해서 조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미군이 지원한 항공기가 제일 먼저 한국전투에 들어온다. 미리 전쟁을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일본이 진주만 습격 시에 미군의 주요 작전병력은 많이 없었다는 사실에 고의적인 전쟁명분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일본과 전투를 벌인 이유는 진주만 습격이고, 그 습격원인은 미국인 일본이 필요한 군수물품 중에 원유수입을 금지한 것이었다. 모든 기계는 석유에너지로 움직이니 그 석유를 공급받지 못할 경우 일본군은 전쟁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행위를 보면 첩보전이라든지 심리전이란 고도의 기술과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위로 인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복구 순위에서 한국이 상당히 뒤에 있는 점, 한국전쟁 후 비로소 지원이 오다가도 그 지원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없고 당시 이승만 정권과의 신경전에서의 지원의 차단은 매우 정치적인 암투가 적대국 사이만 아니라 내부의 갈등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 전쟁을 하는 주체는 정치선택권자가 아닌 선택자에 의해 지시받는 군인이란 점이다.

 

위에서 언급하나 미국이나 유럽 기타 많은 국가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젊은 청춘들에게 나는 분명히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을 보내도록 유도한 자들은 불쾌하게 여긴다. 그들은 한국의 자유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세계패권에 있어서 실험을 한 것이고, 그들의 지원은 진정으로 타국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란 점이다. 자본주의가 성공시키는 것 까지는 좋으나, 그 성공으로 통한 군장비의 획득은 하나의 시장관계가 형성한다. 전쟁은 단순히 밑에 있는 직접적 무력 행위자와 달리 그 과정이 상이한 점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역사란 상징적 기록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민주자유주의와 더불어 탈산업화된 정보시대에 개인의 역사 역시 중시되나, 기본적으로 역사의 바탕은 큰 사건과 기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매우 정치적 입지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이런 과거의 지난날을 어떻게 다시 되돌아 봐야 할 것인가? 남과 북은 대치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서로 초토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남는 것은 오로지 시체와 잔해물이다. 그런다고 지금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과 북, 한국사회, 국제정세가 참 묘해질 수밖에 없다. 단지 있었다는 사실과 왜 있었고, 어떻게 흘러가야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세히 알아갈 수밖에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음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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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의 시대 - 통제하다 평화롭다 불안하다
아르망 마틀라르 지음, 전용희 옮김 / 알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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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자 중에서 현대철학의 기본적인 뿌리가 되던 3사람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예전에 니체가 저술한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니체의 문체는 상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막상 그 문장 하나들을 모우면 무슨 말인지 헷갈린다. 세상에 니체주의는 니체 혼자라는 말이 있듯이 니체에 대한 서적을 보면 뭔가 감이 오지만, 그 감을 잡는 순간 다시 놓친다. 그래도 이 책에서 상당히 인상 깊은 문구가 나온다.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일화인데, 1789년 프랑스혁명이 성공하자 프랑스 높은 계층 중에 롤랑 부인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 부인은 혁명 후에 색 퍼란 단두대 아래 자신의 목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변하면서 외쳤던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

 

따지고 본다면, 자유라는 이름은 얼마나 위대하면서 한편으로 무서운지 끔찍한 상상력을 자아내게 한다. 이른바 저 자유라는 이름이 오늘날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아니라면 먼 미래에 닿는 그 찰나마저도 집어 삼켜지는 하나의 마수가 아닐까 싶다. 자유라는 것은 루소가 제시한 공동체 속의 자신을 포함하여 거기에 따르거나 혹은 홉스가 자유가 자유란 강제력의 부재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처럼,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자유란 칸트처럼 자신의 이성적 의지거나 혹은 밀처럼 윤리적 조건이 따라붙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조금 난해한 부분이 있다. 위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자유라는 관념이 상당히 철학적이면서 깊은 사고로서 풀어가는 것에 반해 현실 속의 대부분 사람들 즉 군중이나 대중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인권인가? 아니라면 개인적인 권리인가? 더 나아가 권리에 대한 권리인가? 자유주의 개념에서 많은 종류가 있지만, 자본이 중심이 되는 자유주의라면 발터 벤야민이 말한 소재가 생각난다. 자본주의국가에서 자유는 자본에 비례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본에 자유가 비례하고 권리와 권력이 비례한다는 것은 곧 자유의 독점이 되는 셈이다.

 

자유라는 것이 돈으로 매겨질 정도로 물질만능주의적인 세상이라면 참 곤란한 일들이 많이 발생될 것이다. 오늘 서평하려는 <감시의 시대>에서 자본주의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나, 조금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대중들 내지 군중들에 대한 자유에 대한 생각을 여기서 보고 생각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은 정치적 표현 내지 부조리에 대한 투쟁에서 자유를 얻기보다는 그저 소비로서 자유를 쟁취한다는 점이다. 즉 인간에겐 자신이 말과 몸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력으로 승부하는 선택권이야 말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틀린 점이 아니다. 과거 동독과 서독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난 후에 동독 국민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서독의 백화점에 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때 비로소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것이 자꾸 소비의 사회로 도래할수록 과연 자유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정말 위험하다. 오히려 그런 사회가 기정 현실화 되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헤게모니적인 당연성이라면 인간의 의식은 본인 자신의 의식이 아니라 누군가 억지로 집어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허구로 되지 않겠는가?

 

그런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군중들을 대중들을 자신들이 지배당한다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그것을 위한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그 인식을 가로막는 것을 생각해 보니 여기서 좋은 문구가 나온다. 질 들뢰즈의 이야기로서 <우리는 더 이상 유폐된 채 작동하는 통제 사회가 아닌, 순간적 커뮤니케이션과 지속적인 통제로 작동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라고 말이다. 통제되는 것이 통제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고, 예전에 강압적인 요소는 비강압적이라 하나, 더 강력한 강압적 통제방법으로 변질되었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공간에서 순간적이란 함은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점이다.

 

포스트모던 즉 탈산업 시대에서 정보매체의 발달은 인간에게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도록 한다. 즉 개인과 개인의 직접적인 대면과 유대보다는 전화, 핸드폰, PC, 인터넷으로 통한 간접적 대면으로 서로에 대해 지속적인 관계를 해체한다. 그런다고 하여 이들에게 유대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들에게 존재하는 유대감은 하나의 전체주의적인 태도로 변질된다. 가령 인터넷문화와 관련하여 한국의 인터넷문화 현재를 돌아보자. 우리 인터넷매체는 강력한 통신과 정보 이용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무 빠른 점과 명확하지 않거나, 혹은 고의적인 왜곡과 조작으로 마녀사냥 내지 사회적 대립이 야기되기도 한다.

 

감시의 시대에서 나오나, 과거처럼 모든 것을 직접적인 폭력수단인 테러보다는 차라리 그 대상지역의 사람들로 하여금 소요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더 좋은 수단이다. 외부의 군사적 테러리즘은 결국 상대국민들에게 공포의식만큼 반발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이에 반대로 정신적 선전공략, 즉 프로파간다적인 수단으로 대상들을 선전하면 매우 효과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아쉽게도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파리8대학의 교수이고, 독자인 나는 한국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군정에서 메카시즘의 열풍과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효과적인 군사적 전략이 미군들의 직접적 개입보다 미군들의 심리전술로 통한 방법이 좋았다.

 

물론 그런 방법은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만이 아니라 북한에 들어온 스탈린군부세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이에 멍하니 당하는 국민들끼리만 서로 싸우고 미워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제법 먹힌다는 사실이다. 강대국들이 상대국가인 식민지 내에서 행한 방법들이 인도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테러리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시체를 유기하고, 심지어 가족들 앞에서 잔혹한 고문과 가족들에게 고문을 가하고 때에 따라서는 살해도 서슴치 않으며, 심지어 시체마저 유기시킨다.

 

감시의 시대에서 이런 폭력적인 요소가 결국 폭력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폭력 원인제공자는 폭력의 시초를 숨기고, 그 폭력의 보복성만을 증폭시킨다. 보복을 당하는 존재들은 그 테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간접적으로 프로파간다에 의해 동조된 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폭력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민간인들이 군인 못지않은 테러를 당하면 군중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불안은 모든 감시의 조건이고 시작이다. 불안을 자극하여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라는 슬로건이 결국 모든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는 단계로 이어진다.

 

폭력을 막기 위한 폭력인가? 아니라면 폭력을 시행하던 자들이 계속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폭력을 하나의 폭력을 가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작용하는 것일까? 본래 처음부터 폭력을 가하거나 그 폭력을 가하기 위해 눈 뜬 장님들의 동의를 받기 위해 감시를 하나의 자유와 평화 유지군으로 활용하지 않았던가? 감시의 기술과 교활함은 그래서 더더욱 발전하지 않은가? 게다가 소비의 자유가 인간의 이기와 편리만을 빠지게 하여 인간의 모든 정보와 사생활이 하나의 칩으로 실시간 감시되지 않은가?

 

어쩌면 감시의 시대는 정말 감시하는 방법보다는 왜 감시하게 되었는가에 치중하는 도서이다. 감시라는 것이 합리적 수단이 되기까지 강대국에서 벌여온 불법행위들이 테러로 다가와 그 테러에 대한 테러리즘이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공포를 잊기 위해 미디어의 조작과 왜곡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우생학이란 것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분류하고 차별하여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존재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우생학은 열등한 존재를 낙인찍게 하여 범죄예비자로 취급한다. 범죄예비자는 처음부터 범죄 할 계획을 준비했던가? 아리면 그들이 범죄 이외에 그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않았는가? 감시의 시대에서 정말 감시를 받을 자들이 오히려 감시를 하고 있다. 그 감시조차도 당연하다고 믿게 하는 눈속임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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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 - 조폭언론과 맞선 노무현 5년의 투쟁기록
김상철.김상철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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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독일 뭔휀에 유럽공동체 회원국 기자연합회와 여러 국제 기자조직이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뭔휀에 모여 이른바 “뭔헨선언”이란 것을 채택했다. 그 채택된 선언은 이미 40년이 넘었고, 그 선언 전문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정보에 대한 권리,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 비판할 권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의 하나다. 언론인의 의무와 권리는 모두 시민이 사실과 의견을 알아야 한다는 이 권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시민에 대한 기자(언론인)의 책임은 다른 모두 책임 특히 그 고용주와 공권력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뜻일까? 그리고 왜 내가 이 선언문 전문 첫 부분을 이렇게도 인용하려고 했을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 과연 언론의 자유가 있는지? 혹은 언론의 책임이 있는지? 또는 언론의 윤리가 있는지? 등등 많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나는 의문이 드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언론매체가 너무 권력지향 적이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권력에 거슬리는 존재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배제하거나 응징하는 것이다. 주변 친척 중에서 방송사를 상대로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친척이 말하는 바로 언론계에 들어다 보면 많은 모순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언론방송계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엘리트적인 우수한 인재라고 할지라도 그들 역시 좀처럼 구시대적인 요소가 다분하다고 했다.

 

 

물론 구시대적이나 신세대적이나 어느 쪽이 좋다 나쁜 것을 따지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언론인들로서 가져야할 양심이란 과거나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도 구시대나 신세대나 모두 가져야할 하나의 가치관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이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자면 내가 이 글을 적는 것에서 약간 한쪽에 편향된 것이 아닌지? 또는 너무 깊숙이 들어다 보고 따질 수도 있다. 그 만큼 이 책에서 다루려는 내용이 너무 무겁고 민감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을 본 사람이라면 한번 2002년 유시민 전 장관이 저술한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읽어 본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2002년 노무현이란 사람이 대통령 선거이전의 언론사와 싸운 이야기라면 이 책은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 그가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닐 때까지의 언론과의 전쟁을 다룬 서적이다. 책 제목도 정말 어울리는 도서이다. “야만의 언론, 노무현의 선택”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것은 부정하지 않을 사실이나, 그런다고 하여 모든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지지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자를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 따라 지지요소를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비판 없는 지지는 단지 종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어떻게 본다면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사실 감정과 무의식적인 요소에 국민들이 많은 반응을 보낸다.

 

 

그렇지만 국민 대부분인 개인들은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어느 특정 정치가들에 대해 직접 옆에서 보고 듣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가들의 옆에 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보고 들은 후에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오로지 언론이다. 언론만이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어 보여주고 들려준다. 만약 그런 과정에 정말 제대로 전달했는지 아니면 거기에 누락되었거나 혹은 추가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방송매체나 언론매체에서 그대로 찍어낸 미디어만이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래서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의 유명한 서적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표지(출판사 민음사)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이미지는 실제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실제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실제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다. 이것이 바로 지시 대상도 테두리는 없는 끝없는 시뮬라시옹의 순환 속 시뮬라크르이다. 무언가를 감추는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없음을 감추는 것으로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방송언론매체는 우리가 직접 눈앞에서 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방적인 관점이나 혹은 전부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일부만 또는 허구의 것으로만 칠해버릴 수 있다. 진실이 아닌 허구이기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그 허구의 것들이 더더욱 진실일 수도 있다. 진실은 뒤로 가려진 채 허구의 이미지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여 나타난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어떻게 본다면 진실이 나와도 시뮬라크르이다. 과거에 뉴욕 911테러사건에서 분명 미국에 큰 비극과 많은 인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우리는 직접 현장에 가서 그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갔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실제로 그 비극의 현장만 남은 어두운 거리의 풍경만이 우리를 반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이미지가 녹화된 가상세계는 아직도 건재하다.

 

 

우리가 늘 살아오면서 이런 가상세계가 펼쳐져 있는 이미지의 매체, 즉 미디어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현대문명사회가 있는 어느 국가라도 이 미디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평생 미디어부터 정보를 받고 그 정보에 따라 사람들은 움직인다. 그래서 지속적인 미디어의 노출 속에서 인간은 어느 특정 정보가 일방적인 정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비판하기 어려워진다. 즉 미디어는 정보의 유통에서 이데올로기의 전환까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의 전환에서 이데올로기는 과거 이상의 이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념이라는 것으로 바뀐다. 솔직히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눈에는 존재하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영역이나 그것은 현상화로 바뀌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양식과 일상생활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결국 이미지의 매체, 즉 미디어로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이미지라는 점에서 현대사회가 이미지를 매개하여 움직이는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스펙타클이란 것은 누가 고의로 혹은 누가 고의로 만들지 않아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현상화해버린 현실이다. 스펙타클의 존재에 노출되는 국민은 결국 대중(mass)이라는 존재다. 거기서 대중들은 군중심리로서 미디어에 반응한다. 그것이 정말 맞는지 틀렸는지 말이다. 그런 현상에서 가장 시달린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도 조선일보와 전쟁을 하였다. 그의 길고 질긴 언론사들과 전쟁이 이제 대통령이 되고나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번졌다.

 

 

이 책을 읽으면 평소 노무현하면 실패한 대통령, 개혁에 도전했으나 미완에 끝난 대통령이란 말이 나온다. 게다가 임기 종료 후에는 불명예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아마 당시 검찰과 수구기득세력권과 대형 언론매체에서는 그의 죽음을 분명히 노렸다. 그의 죽음 정치적, 사회적 죽음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정치적, 사회적 죽음 대신 생물학적인 죽음을 선택했다. 물론 그것이 자살이라고 해도 정말 자기 의지로 죽음을 선택 했는가 이다.

 

 

그의 죽음은 타살에 가까운 자살이다. 이 정치와 사회가 그리고 권력이라는 거대한 손이 말이다. 그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것은 바로 언론사들의 작품이다. 대형신문업체에서는 노무현을 매우 싫어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고교출신 변호사가 엘리트집단에 오는 것부터 난색을 표했다. 한국의 엘리트주의에서 부산에 있는 상고출신인 노무현으로서는 반기지 않고 싶은 존재다. 게다가 현실 안의 거대한 권력에 의지하기보다는 그것을 저항했다.

 

 

니체와 푸코적인 의견으로 본다면 도덕은 정말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러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점이다. 아니라면 현실사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 분명 그것이 틀리고 잘못된 일이라도 힘이 없는 이유로 부당하게 누군가에게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이 법적인 제도적인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도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하나의 룰이라고 한다. 도덕이라 것은 하나의 룰이다.

 

 

국가는 국가 권력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처럼 그 권력들은 언제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가진 자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곧 거대한 세력들에게 제거되어야 할 존재다. 노무현이란 존재는 기득권세력들에겐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그를 죽이려면 단순히 그를 국가 권력을 이용해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사회논리로서 귀결해야 한다. 언론이란 것은 바로 폭력적인 언어로서 사회를 조장하는 하나의 선동자다.

 

 

이 책에서 보이는 일들을 보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과거정권에서 공약한 정책에 대해 당시 신문사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국방정책에서 전시작전환수권에 대해 많은 지지와 성명을 보냈다. 노무현이 처음 대통령이 되면서 전시작전환수권을 제기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노무현 이전에 많은 지지와 성명을 보낸 그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다. 연설문 처음부터 끝까지를 보면 분명히 그런 부정적인 언사가 아닌데, 그들은 그 연설의 중간만 잘라 붙이기 식으로 하여 부정적인 요소만 선전했다. 짜깁기라는 몽타주적인 요소를 반복하여 신문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거짓된 루머를 진실인양 보도했다. 만약 그것이 틀린 것이 들통 나면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응대했다. 조폭언론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런 책임감 없는 요소와 꼬투리만 있으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삽 하나만 판 땅에 마치 불도저가 지나간 것처럼 꾸며대었다.

 

 

그런 언론들의 권력적인 횡포와 폭언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나서부터 끝날 때까지의 일이었고, 퇴임 후에 시골에서도 끝없이 싸워야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만을 겨냥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이들과 반대되던 한겨례와 경향신문까지도 포함했다. 그들은 평소 대형신문매체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막상 불리한 입장에 오면 마치 그들과 같은 페이스로 유지한다. 마치 자기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순수한 존재라고 말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대형신문매체만 비판하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저항하는 신문언론도 같이 비판했다. 자신들의 권력과 자신들의 이익, 자신들의 안위만 찾는 그 모든 언론을 비판한 것이다. 최근에 읽어본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이런 내용이 기억난다. 진정한 자유주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느 일부분만을 위한 포괄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포괄적 자유주의도 민주적 자유주의에서 하나의 자유주의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런 다시 내가 이 글을 적으면서 초반으로 돌아 가보자. 왜 뭔헨선언이 필요했을까? 내가 노무현을 좋아한다고, 이 글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꼭 그를 좋아하든지 말든지 그를 무조건 좋아해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단지 내가 이때까지 글을 적으면서 그에 대해 제대로 한 번이라도 보고 듣고 판단한 것이 옳은 정보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한 번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미 야만의 언론 속에서 노무현은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노무현이 죽음을 선택해도 아직 이 글을 적는 나와 이 글을 보는 당신은 살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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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남자의 물건? 이 말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전에 내가 근무하는 회사와 계속 거래를 하고 있는 인쇄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해당 보고서를 발주처에 납품하기 위해 나는 보고서를 제본하기 위해 인쇄소에 들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 나를 아주 반갑게 반겨주시는 사장님, 그 사장님은 참고로 연세가 60이 이미 훌쩍 넘은 여사님이다. 내가 <남자의 물건>이란 서적을 들고 가니 순간 놀라면서 나에게 이렇게 했다.

 

“이 책 나 사려고 했는데, 너무 야한 것 같아서 안 샀다. 손님들이 여기 와서 이 책이 있으면 이상하게 여길까봐”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야하지 않다고 했다. 물론 내용 중에서 야한 내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책 내용 자체만으로 야하다고 보기에는 많음 무리수가 있었다. 가령 그것은 프로이트가 남자는 성욕에 눈이 먼 동물이라고 하여 그가 저술한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입문>과 같은 도서가 야하다고 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식 세계의 리비도 즉 성적 에너지를 담아 그것을 표출하려는 본능은 숨기지 못할 요소는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인간의 성적 무의식 본능을 연구한다고 해서 야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야한 것에 대한 것을 제대로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운 교수가 이번에 내놓았던 <남자의 물건>은 정말 그런 식의 느낌일까?

 

보통 어른이라면 남자의 물건이라면 가수 박상민씨가 부르던 “무기들아 잘 있거라” 내지 혹은 이 노래 제목을 패러디한 어느 팬의 말처럼 “무기 없이 못살아”라는 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물이라는 물건이다. 즉 인간의 신체구조 상의 기관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 볼 수 있거나 혹은 볼 수 없을 만한 사물들이란 점이다. 인간이 아닌 물체 즉 하나의 도구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왜 남자의 물건인가? 예전에 김정운 교수에 대해 잘은 몰랐으나, 그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라는 점은 알았다. TV는 시청하지 않은 본인으로서 매스컴의 영향보다는 매스컴 이외의 인터넷과 서적으로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오히려 일방통행로적인 사고방식은 대중문화의 특성중의 일원화적인 사고와 이원화적인 가치구조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게 된 김정운 교수는 예전에 내가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튬플레이와 같은 하위문화(下位文化) 즉 Sub-culture라는 것을 연구할 때 처음으로 알게 된 문화심리학자이다. 일단 하위문화라는 것이 일반인들에 대해 잘 노출되지 않고 비공개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그런 문화들이다. 물론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프레만이 아니라 락, 재즈, 블루스, 헤비메탈과 같은 비주류의 음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하위문화에 대한 나의 시선은 대중문화에 대하여 비교해보면 다른 세계에서 바라보는 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하위문화라고 하여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고, 잘 알 수 없으며,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고 다가가는 것이 어려워서 많이 낯설어 하고 많이 배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한국과 같이 배타적인 문화 관념을 지닌 국가로서는 이런 것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런 하위문화가 배타적인 국내 문화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나의 적대의식으로 표출되기 좋은 문화이다.

 

또한 본인 자체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 만화, 애니메이션이 국산 작품보다는 미국과 일본 등에서 유입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많은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상품들은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들어온다.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우며, 언어자체가 한자어가 같이 사용하기에 한국어와 일본어 자체로는 다소 많은 차이감이 들지 모르나, 단어 사용에서 한자어의 사용에서는 분명히 한국인으로서 영문으로 이루어진 미국 문화보다 한자 단어가 들어간 일본어가 훨씬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고 생각해본다는 것은 단순히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안에 담론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 대한 문화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볼 만한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항상 뭔가 멀리 느껴지는 나라, 게다가 직접 옆에서 보면 한국인과 다른 용모나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인들이 보면 비슷해 보이는 종족이다.

 

또한 과거 한국의 선조들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말도 있고,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가 일본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막상 수목의 원산지는 한국이라고 한다. 그러면 일본의 국화를 상징하는 이른바 사쿠라라는 것이 과연 일본이라고 외치기도 난해하게 보이는 상황이다. 어째든 친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대하기가 어려우면 어려운 게 일본이다. 아니 일본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인지하고 있을까? 그런 문제에 대해 김정운 교수는 <일본열광>이란 책을 저술했다. 문화심리학자가 보는 일본과 일본인이다. 여기서 그의 일본이란 나라는 상당히 특이한 곳으로 보였다. 뭔가 억압된 공간이고, 뭔가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환타지, 남성이 감수해야할 사회와 압박, 거기에서 피어나는 남자들의 어리광, 서양은 아니나 오히려 서양 같은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세계, 일본이란 뭔가 엄청나게 잘 뭉쳐져 있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 무척이나 분산되어 있다.

 

아니 아주 작은 분산덩어리가 여기저기 조합되어 하나의 그룹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일본을 다룬 김정운 교수가 이제는 한국을 다루려고 한다. 일본으로 통해 일본인을 알고 그 후에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보게 하여 우리 자신의 현재를 물었다면,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정석이 아닌가? 이번의 남자의 물건, 정말 남자의 물건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대략적으로 나는 이 책에 대해 조금의 선입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김정운 교수가 일본열광에서 남자의 세계로 통해 본 일본문화라고 하나 단순히 일본남자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남자의 문화에서 보이는 남자들의 몰락을 다룬 것이다. 남자가 몰락하니 여자가 힘이 세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세진다고 하여 남자와 대등하게 되었다고 하여 남자만 이때까지 누렸던 것을 이제는 여자가 누리지 말라고 하는 법은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남자는 여자가 누리던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본열광이나 남자의 물건이나 비슷하고 기본명제를 깔고 가는 주제가 있다. 그것은 남자의 몰락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남자가 몰락한다고 해서 여자가 반대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남자가 떨어지는 만큼 여자 역시 떨어질 수 있다. 모두 그런 것이 아니다. 남자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과거가 좋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상실해가면서 남자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남자는 평생 혼자서 짐을 지고 가야 할 동물이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스신화 오이디푸스왕을 아는가?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그의 아내요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라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한 그 비운의 왕을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와 동시에 모친근친상간이라는 인간의 윤리와 가치를 배반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남자는 바로 이 오이디푸스와 같다. 세상도 그러나 오히려 신화의 세계에서 멀어진 지금이야 말로 신화의 제거인 계몽을 넘어 새로운 억압이 우리 남자들을 오이디푸스로 만들어버린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이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큰 아들이 자라나면서 처음에는 약한 존재로 보았으나 지금은 키도 자기보다 크고 덩치도 좋다고 한다.

 

순간 아들이 화를 내면 거기에 대적하기 힘들고, 길가는 고교생 무리를 보면 기가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서 누가 부른다. “아버지!”라고 말이다. 그 두려운 무리의 존재 중에서 아들이란 혈육이 있다. 아버지란 존재는 언제 자신을 앞서 나갈지 모를 아들에게 위협적인 부담을 느끼고, 자신 앞에 있었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방황한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결국 내가 된다는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남자의 허망함을 깊고 넓은 한탄으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면 직장 상사와 밑에 후배들의 눈치를 본다. 물론 그 상사와 후배 역시 또 다른 상사와 후배들에게 눈치를 본다. 남자라는 존재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은 뭔가의 긴장감을 타고 있다. 항상 긴장을 하고 눈치를 보고 거기에 눌려 산다. 사회라는 것은 다양한 존재가 살아가는 또 다른 아버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억압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언어를 아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들에게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부여한다.

 

하지만 언어로 통해 권력과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생산하므로 언어를 사용하고 살아가야할 인간에게 언어를 사용할 때 새로운 지식과 더불어 권력에 눌려 살아야 한다. 언어라는 것은 자연적이 못한 인위적인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공간을 어디로 두어야 하는가? 직장이라는 공간은 남자에게 하나의 권력세계를 의미하는 바이므로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둘 수 없다.

 

오로지 여기에 반대되던 공간일 뿐이다. 그나마 젊어서는 와이프가 같이 젊기에 서로 열정적인 사랑도 나눌 수 있겠으나, 얼마 후 자녀가 태어나고, 부모들은 서로를 보기보단 자녀들을 더 본다고 한다. 그런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겠으나, 적어도 내 주변에 애를 키우고 있는 직장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 보는 재미보단 혹은 남편 보는 재미보단 애와 같이 보고 지내는 시간으로 만족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자녀라고 하여도 언제까지 부모의 그늘 아래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 모두 자녀들이 서로 자기의 품을 떠나 그들만의 사회와 세계에 머물고 있을 때면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나마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지만, 남자는 쉽게 지낼 수 없다. 나이 들면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반면 남자들은 그렇게 모이기도 어려우나 모여도 그렇게 화기애애하지 않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사회에서 싸워나가야 할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들이 태어나면서 리비도로 통해 성적인 욕망과 더불어 폭력적인 투쟁의식을 가진다고 하나, 이와 반면에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남자는 원래 난폭한 것이 아니라 난폭해지도록 살아야 하는 문화 공간 속에서 난폭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다르지만, 적어도 남자는 항상 싸움과 피할 수 없는 존재임만은 분명하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것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남자는 프로이트적으로 리비도의 동물로 성적욕망만 표출할 수 없다. 때로는 새로운 것으로 승화하여 에로스적인 영역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문학에서 세계를 창조하거나 예술로서 형상화시키거나 이미지로 도출해낼지도 모른다. 예술이 이성의 세계만이 아닌 감성과 무의식 세계라는 눈에 보이지 않은 것 역시 보이게 하는 마법이 있으니깐.

 

그러나 이것만으로 남자가 과연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뭔가 남자들이 집착하고 거기에 얽매이고 싶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물욕적인 페티시즘이 깊숙이 들어갈지 모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나 한국남자에게 뭔가 좋아하는 게 있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나이 먹어 한국남자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대부분 이런 것이 생각난다. 낚시와 등산이라고, 아니면 TV보기 정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게다가 낚시와 등산은 여러 명에서 같이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혼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취미생활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로 남자들이 위안을 삼아야 하는가? 너무 평범하고 일방적이고 범주가 좁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도 같이 생각하여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의 물건에서 김정운 교수는 이런 한국남자에게 존재확인을 위한 탐사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부터 먼저 보여준다. 김정운의 모습에서 그의 일반적인 복장에서 만년필을 자신의 입에 살짝 대는 장면이다. 한국의 저명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바로 만년필을 좋아한다. 만년필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만년필이 아니라 상당히 고가에 명품인 만년필을 좋아한다. 몇 십 만원에 모자라 어느 유서 깊은 만년필은 백만 원을 초과한다고 한다.

 

펜 한 대에 거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계속 모우고 또 모운다. 새로운 물건을 산다는 것에서 그 산 물건들을 보는 것에서 또 다른 물건들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말이다. 한국남자들에게 이런 기대감 내지 편안함 기분을 주는 행동이란 있을까? 내가 볼 때는 거의 없다. 그런 남자들에게 필요한 물건! 그것은 바로 그 남자들이 의지하고 싶은 물건들이다. 자신만의 세계이며, 자신만의 공간이며, 자신만의 위안이 되는 그 남자의 물건 말이다. 김정운이 확인하는 한국남자의 존재란 바로 남자들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런 물체에 대한 고찰이다.

 

왜 고찰을 하는가? 남자들은 나이 먹어가면서 정작 자신을 돌아볼 공간이나 기회조차 없다. 오로지 앞만 보다가 달리다가 뒤돌아보는 순간은 이미 늦은지라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이란 점이다. 확실히 그렇다. 아니 30대 지금 내가 봐도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바라보면서 주변 남자들에게 주말에 무엇을 하느냐? 아니면 좋아하거나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없다.

 

그저 컴퓨터로 영화 보다가 TV로 드라마 보다가 이다. 남자들의 대화의 단골손님이며,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 그 절묘한 콤비네이션인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남자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 확인을 해줄 수 있는 하나의 자위욕구가 아닌가 싶다. 자위라는 것이 반드시 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성적인 영역 역시 무시하지 못한다. 항상 억압된 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성적욕망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들은 단순히 억압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내어 자기 자신을 위안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남자의 물건, 그것은 단순히 남자들이 취미나 취향으로 모우거나 집착하거나 즐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가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증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는 본인이나 다른 누군가, 또는 이 글을 보는 어느 누구라도 그런 것으로 생각 한번 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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