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종말
폴 R. 에얼릭 & 앤 H.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 부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환경공학과를 전공하여 이제 환경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본다면 조금 환경을 다른 부분 혹은 영역을 확대한 도서라고 말하고 싶다. 기본적으로 환경공학에서는 수질·대기·토양·생태계 등 다양한 환경 분야의 학문을 배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는 마치 처음 보는 서적이라기보다는 과거 내가 학부시절이나 혹은 환경 직종과 연계되는 기사 및 산업기사 자격증 시험을 응시할 때 보던 하나의 수업에 가까웠다.

단지 그런 환경공학과란 학문이 공학과 과학의 다양한 조합에서 이루어진 학문 체계라고 본다면 이 책은 그런 환경공학에서 배워야 하는 수질, 대기, 토양, 생태학 등에 생물학, 진화학와 같은 순수 영역의 자연과학, 그리고 철학,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윤리학 등과 같은 다양한 인문학 적인 영역이 같이 곁들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런 부분을 인지라도 하는 듯 저명한 사상가인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맬서스와 같은 이름도 보인다.

참고로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마르크스의 도서를 읽어보았는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와 당시 근대화로 이어지는 공업화에서 보이는 연관관계를 다시금 이 책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또한 마르크스 도서를 읽기 전에 구조주의 인류학 및 신화학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미국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 <작은 인간>과 같은 서적을 읽었다.

그렇게 이미 환경공학 전공분야라는 기초 위에 각종 인류학 도서, 그리고 간간히 읽던 인문서적들에서 이 책을 읽는 내 심정은 이 책이 출간되는 것은 하나의 당위성으로 보였다. 일단 나는 이 책을 보며 내가 현장에서 겪은 일 내지 혹은 방송이나 미디어에서 접한 것을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은 <진화의 종말>인데, 그 진화의 의미가 단순히 다윈이 제시한 생물학적인 종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적 진화에 크게 지목했다.

물론 자연적인 조건에서 문명은 변화해 왔으나, 지금의 자연은 오히려 문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연은 그런 영향으로 인해 그동안 받아오던 압력에 그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준 영향은 대략적으로 예상하고 출처를 밝혀내 갈 수 있는 반면 자연은 예고 없이 나타나고 그 범위나 위력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일단 한번 우리나라의 지독한 강우로 인해 산사태 사건을 회상했다.

나는 우면산에 위치해 있는 서울시의 시민은 아니나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그리고 환경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본다면 이 참사는 단순히 자연재난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연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으로 생긴 문제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토사가 산 아래로 밀려와서 인명에 대한 손상과 재산에 손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분명 우면산 일대는 어느 정도 안전재난과 관련하여 토목설계가 구비되어 시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건을 일어났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던 범주에서 큰 규모로 자연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가령 서울이란 도시는 대부분 평지에 낮고 낮은 산과 구릉지로 구성된 장소다. 그런 장소에 홍수 방지를 위해 또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한강이라는 거대한 하천이 있다. 따라서 치수체계로 보자면 서울은 산악지역이 많은 다른 한국 영토에 비해 풍수해에 안전한 지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은 가장 홍수에 취약한 도시이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도로와 건물들이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물이 지면 아래로 들어갈 수 없으며, 풀과 나무가 있는 초원과 숲이 부족하여 강우수를 그대로 지면위로 들어낸다. 또한 거대한 하천인 한강으로 가는 수로 역시 제대로 구비되어도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진화의 종말>을 보고 서울 우면산 사건을 보면 그 당위성은 확실히 보인다. 그것은 이미 내가 제시한 불투수성 표면 증가에 따른 물의 유출수가 그대로 지표면에 떠도는 사실, 다른 하나는 그 물이 하천으로 유입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체되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에서도 환경적인 문제가 발휘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식량 이외에도 각종 사회적 서비스 즉 SOC(사회간접자본) 영역에서도 재해부분이 일어나는 점이다. 내가 먼저 제기한 우면산은 서울시의 비싼 부동산 물가와 거기에 동반한 낮은 토지를 찾아 개발하거나 혹은 더 높은 가격을 얻기 위해 비싼 부동산이 위치한 주변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면산의 경우는 분명히 수리학적으로 강우강도를 견딜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이다. 도시계획에서 전반적인 치수관리가 이루어지나 소규모단계에서는 보장하지 못한다. 만약 어느 장소에서 강우량이 100㎜/h로 내린다면 보통 국내 강우빈도는 30년, 50년으로 설계되어 100㎜/h 이상 내려도 무사해야 한다. 그러나 무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우수라는 것은 그렇게 100㎜/h로 설계한 곳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설계하지 않은 곳까지 연계된다.

물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다면 하류에서 방비를 철저히 해도 상류나 혹은 다른 지역의 우수가 지면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자연스레 그 물은 아래로 갈 것이다. 또한 100㎜/h이란 수치도 1시간 이내이지 3~4시간 지속되면 이른바 임계점을 넘게 되어 그 효능을 상실한다. 아마 우면산은 그런 문제로 인해 붕괴되어 토사가 유출되어 아래에 우치한 동네를 엉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다른 점을 미루어 부동산의 과잉투기는 하수관거나 혹은 우수관거 같은 인프라 시설을 투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관계를 간과했고, 자본주의는 환경적인 부분을 간과한 것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실용적이고 이익이 연결되므로 당장의 문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그대로 방치된다. 그래서 한강이나 주변 하천으로 유입될 관로가 부족하거나 있다고 해도 관로직경이 부족하거나 직경이 충분해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우수가 밀려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이런 문명의 진화 즉 자본주의경제체계의 가속화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찰하고 예를 들었다. 위에서 내가 예로 들은 우면산 사건은 솔직히 말하여 서울시로 본다면 큰 자연재해이나 지구단위로 보면 아주 작고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면산 사건의 피해범위는 지구환경위기에서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 때문이다. 물론 당시 피해자와 국가적인 손실이 거대하도 말이다.

<진화의 종말>에서는 단순히 일시적인 환경문제가 아니라 잠재적이고 거대한 환경문제가 나왔다. 육식의 지나친 가속화로 식량의 대부분이 사료로 들어가 전 세계 빈곤국가 국민들이 굶주려 간다던지, 제3세계의 과잉 출산으로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에 그리고 각종 질병까지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오래 살 수 있는 기회는 주었지만, 이에 반해 인구폭발이라는 문제를 발생시켜 물, 식량, 에너지 문제를 야기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거의 미지수 혹은 마이너스에 가까운 형국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는 가만히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매일 병들어간다. 내가 듣기로는 매일매일 여의도 크기의 지구 표면이 사막화되어 가고, 매일 환경오염 문제로 사람이 죽어간다. 당장 내 눈에는 비추어지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광범위적으로 발생하여 결국 언제가 나에게 도래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시했다. 과거 체르노빌을 비롯한 어떤 나라에서 원자력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방사능이 그 지역 주민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반경 몇 십㎞ 혹은 몇 백㎞에 서식하는 자연과 인간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지구 국지적 내지 국부적인 영향이 아니라 더 넓은 국가적 내지 세계적으로 문제를 주었다. 이 방사능은 분명 과거 소비에트 연방 지금의 러시아 인근의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이 미국 대기층에도 올라갔다.

또한 중국의 모래가 중국 내가 아니라 미국이나 서구유럽까지 번졌다. 그것은 이 책에서 양모의 수확을 위해 염소들을 대량으로 사육했는데, 문제는 그 염소들은 풀을 계속 먹고 먹어 결국 토양을 사막화했다. 다시 염소 사육을 위해 그 사막화된 토지를 떠나 다른 토지를 찾아갔으며 이것은 사막화의 가속페달이 되었다. 이것이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사실은 오로지 사막화된 부지였다. 하지만 사막은 원래로 복귀되지 않고 끊임없이 모래폭풍만 지구에게 보냈다.

우리도 봄이 오면 중국의 황사로 고통 받는다. 최근에는 중국의 대기오염이 증가되면서 각종 중금속 및 화학물질까지 달라붙는다. 환경문제는 이제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대기오염 문제를 보자고 하니 이미 산성비는 인간의 식수, 인간의 식량이 양식, 자연개체의 안전까지도 위험했다. 자연계의 생존만 아니라 예전 유럽의 심각한 대기오염은 위대한 문화제까지 파손했다. 왜냐하면 최고의 조각물들이 모두 산성비에 약한 석회질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석회질이 탄산칼슘으로 되어 지면으로 흘러내리니 석상의 모습은 온전할 수 없다. 

게다가 자연계의 석회질로 구성된 새의 알과 달팽이와 조개의 집과 껍질들은 단단한 보호막이 아니라 살짝 충격을 주어도 부수어지는 젤리처럼 되었다. 산성비는 pH가 낮기 때문에 동물이 아닌 식물에게 영향을 주고, 토양을 부식시키고, 호소수의 생태계를 파괴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영역에 레드카드를 주었다. 사실 경고의 의미인 옐로우카드를 주기에는 너무 많이 달린 것이다.

이런 문제를 보자? 우리는 자연생태계 파괴로 먼저 답답한 도시에서 새집증후군, 새차증후군, 열섬현상에 시달리지 않은가? 또한 열이 많은 도시에서 새집증후군을 일으키거나 혹은 헌집증후군을 일으키는 빌딩 안에 외부의 더위와 추위를 피해 에어컨과 히터를 킨다. 에어컨 냉방병을 주고 히터는 일산화탄소 농도를 올리게 된다. 이런 문제가 될 때까지 인간들은 너무 안이했다. 아니 관심가지기 싫어했다.

단지 자기 앞에 나타지 않으면 피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방관적 태도이다. 경제강대국과 부유층들은 자신들의 이익도모와 주변의 쾌적함을 위해 제3세계의 숲을 파괴하고 강을 도려낸다. 그 결과 대기의 열을 흡수하는 하천이 사라지고, 그 열들은 북극의 얼음을 파괴하여 해수면 상승시켰다. 숲을 파괴하니 대기의 산소농도가 감소하고 탄소증가로 기온이 올라가 다시 그런 열문제를 해결하는 대응책 상실했으니 더욱 피해가 가중된다.

결국 다시 외면하려는 인간들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탄소배출권 문제를 다룰 때에 어느 국가는 그 안건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지구에너지 소모하면서 책임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자국의 문제가 터지지 않으려 하고, 터지려 한다면 주로 빈곤계층 내지 약자들에게 미룬다. 그런 행동들이 또 다시 돌고 도는 자연의 지구시스템이란 자연과 혹은 인간이 만든 문명체계가 다시 자연의 지구시스템에 의해 문제가 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진화의 종말>이란 단어처럼 과연 지구가 종말이 오는가에서 나는 온다라고 말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은 과연 진화하고 있는가에서 나는 진화보다는 퇴보가 맞다고 본다. 인간이 아닌 생태계의 동물, 식물, 미생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위급하거나 혹은 큰 문제가 생기면 모두 멸종하거나 혹은 객체 자신의 변화로 생존한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 최악의 발암물질인 DDT는 어느 순간 그것을 맞아도 멸종하지 않은 해충들을 양산했다.

그것뿐이겠는가? 인간은 오래 살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가 의학의 발달이다. 특히 인간이 태어나면서 몸에 붙는 토착미생물은 주변에 잔존하는 떠돌이미생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 인간의 피부 외에 붙어있는 많은 미생물이 인간의 면역체계에 도움은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의 기회감염이란 큰 악재를 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상처나면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과거 이런 항생제 발견 이전에 세균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발병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느 순간 페니실린이란 항생제가 나오고 그것보다 강력한 메타실린이 나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구에 많이 분포하는 황생포도상구균은 메타실린에 대해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뛰어 넘었다. 이른바 병원감염에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는 MRSA(메타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 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라는 슈퍼 박테리아를 양성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MRSA보다 더 강력한 세균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VRSA(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상구균(vancomycin 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이었다. 인간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갔으나 인간의 면역력은 감소하고 퇴화하는데 반해 오히려 미생물은 강력해지고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수질로 인해 감염되던 콜레라나 이질은 상하수도 시설개선과 확충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미생물들은 막을 수 없었다. 인간의 문화의 진화하는데 반해 자연계의 미생물처럼 자신의 내성은 잃어만 가고 있었다.

최근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사무실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친구는 나처럼 환경공학과를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 중의 생물학과를 나왔다. 그는 이렇게 나에게 말했다. 여자가 아이를 가지기 위해 임신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랬다. 예전에는 여성의 배란일과 남성의 지나친 음주만 아니면 언제든지 수정착란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남자나 여자 모두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면 술과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낳기 위해 호르몬 촉진제까지 맞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기를 못가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남자 역시 예전보다 생식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내가 대학 다닐 시절에 어느 생물이 수컷이었는데, 호르몬 문제로 암컷으로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컷인자가 호르몬작용제로 결국 자기 종족의 유지까지 위기를 맞이했다. 실제로 지나친 환경오염으로 어느 생물의 성염색체 유전자인 XY에서 Y의 출현이 낮아졌다고 한다.

과거 인간은 문화적인 영향으로 아들을 가지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인류 보전 문제로 인해 아들을 가지기를 바라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런 염색체 문제로 크게 사회적 이슈로 오르지 않으나, 적어도 여성이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그것도 상당히 노력해야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은 계속적으로 자신들만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희생한다. 가끔 보면 그것이 인간이란 자기 존재여도 말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희생을 추구하여 당장은 안락을 도모할 상황이나 계속되는 희생유도플레이는 그 유도자까지 목을 옭아맨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런 문제를 나는 계속 여기저기 본다. 전공이 환경이라는 것과 환경으로 경제적·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눈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은 존재 말이다. 하지만 가끔 환경으로 먹고 사는 입장에서 그것은 정말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연이란 존재에 타협하기에 기대되는 이득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아킬레스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그것을 놓치면 더 큰 피해가 그 이상으로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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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음모론 -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조작되었다!
제이미 킹 지음, 이미숙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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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음모론이란 서적을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예전에 내가 보아왔던 책들에 대해 약간 다시 상기 시켜준 듯하다. 특히 노암 촘스키 총서와 같이 근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강대국들의 음모와 그 음모에 희생된 많은 국가와 그 국가의 사람들에 대한 부분이 생각났다. 그리고예전에 보았던 레바논전쟁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학살극을 다룬 "바시르와 왈츠를",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화씨 9/11"도 생각났다.

그 이유는 과연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쟁, 테러, 우리가 셀 수 없이 부딪히는 비극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이루어졌을까? 내지 이것이 과연 우연이 아니라도 그렇게 비극이 톱니바퀴에 이빨을 서로 맞물러 끼워넣듯이 맞을 수가 있는가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런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모두 틀렸다 이 책이 진실이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납득되기 어렵거나 납득되더라도 너무 앞뒤가 잘 맞아 마치 누군가의 손아래 놀아나는 기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언론과 미디어에서 "이것은 이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믿어 버리기에는 뭔가 만족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한국에서 많이 일어났고, 한국이 아닌 곳에도 많이 일어난다. 멀쩡한 사람들이 어느날 죽어버리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멀쩡한 인간이 아주 어려운 상황을 무릎쓰고 유명인들을 살해한다는 것은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현실을 그대로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 책을 보는 내내 조금 다소 억측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너무 앞뒤 상황이 잘 맞아 떨어지는 점. 예전에 보았던 여러 서적, 또한 뉴 오더 월드라는 극단적인 파시스트 이야기들, 이 모두 배후에 뭔가 있을까? 솔직히 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 언론과 미디어에서 분명히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다르게 보여주거나 해석한다. 심지어는 아예 없는 일인양 말끔하게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다. 사실 언론과 미디어에서 여기에는 국가적인 혹은 권력이라는 대규모 세력이 뒤에서 배후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미셀 푸코라는 학자는 현대사회 대중들은 국가 정치권력보다는 미디어에 의해 통제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아니라면 대중들을 미디어에 그대로 노출하여 더 이상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정해진 틀에 맞추어서 스스로 사고하기 보다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마치 이 사회의 구경꾼으로 만들고 싶은 "스펙타클의 사회"로 꾸미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가지 중요하고 진실한 이야기가 있다면 분명 이런 사건에는 일련의 음모가 없다고 할 수 없고, 그 음모 속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추잡한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추악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추악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면 그들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감추려 든다. 왜일까 그들도 양심이라는 엉성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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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Ⅱ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3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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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2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연 자본은 마르크스가 당시 어려운 환경에 처해진 대다수의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만을 위해 적었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시야를 가지고 적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인 듯하다.
 

그 이유는 자본 1-1권과 1-2권을 읽을 때에는 분명히 마르크스는 부도덕한 부르주아의 태도와 거기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착취현상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또는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고찰하였다.

그 부도덕한 비인간적인 형태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착취도에서는 부르주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동 및 청소년들의 부모들까지 책임이 있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이를 헐값에 공장에 보내고, 아이가 힘들게 벌은 돈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들도 결국 그 부모 역시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살아옴에 따른 일련의 피해의식 내지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이런 구슬픈 인간의 비애와 사슬들은 결국 풀어내지 못한 채 수 백년을 이어간 것이 역사의 상처이다.

그런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한 당시 사회관을 본 후에 자본2권을 내 오른손바닥에 들고 읽으니 분명히 전에 읽은 자본 1-1권과 1-2권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은 곧 노동수단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잉여생산물을 많이 만들어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가 다시 원래의 자본과 잉여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본2권에서는 그 자본의 유통과 흐름 그리고 산업에 따른 자본의 변화능력, 그 외로 자본의 이동경로까지를 상세히 서술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이나 혹은 상업과목을 배울 때에 등장한 내용과 거의 유사한 내용들이 나왔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2권에서는 그런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다. 불변자본, 유동자본, 유통자본, 고정자본 등등의 여러 가지 자본을 각 특성별로 나누었고, 거기에 따른 자본 소요형태와 다시 자본의 이동에서 보이는 그 형태를 추적하니 솔직히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분석능력에 입을 다물기 어려운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전에 그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자본2권 보면서 느낀 것은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었던 당시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는 분명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여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입장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고용주인 부르주아의 입장도 같이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자유는 곧 국가적 통제 및 관리의 부실을 틈을 타서 이른바 독과점이 이루어지어 결국 일부 기업만이 살아남아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사라져 가는 점이다. 이런 부분은 대규모 자본가에 의해 소규모 자본가들이 자본능력을 상실하여 그들 역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현대사회의 한국, 미국 등의 다양한 국가에서 대기업 독과점 및 과다경쟁으로 통해 중소기업이 망하거나 합병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만약 기업들이 합병될 경우 자본이 한곳에만 몰려가고 결국 다른 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함으로 올바른 경제구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을 이미 마르크스는 문제를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도 그러하거니와 기업주들 즉 부르주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유입, 유출 그리고 이동에 대해 상세히 고찰했다는 점은 “자본”이란 도서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성경”이 아니라 부르주아 역시 참고할 만한 교과도서 같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정자본 즉 불변자본인 공장의 기계운영에서 기계의 구입비용, 운영비, 수리비, 내구도에 게다가 기술발전에 따른 기계의 신종 발생으로 통한 고정자본인 기계가 그만큼 자본적 가치가 하락한다는 점이다. 또한 유통과정에서 창고의 적재 및 보관, 운송에 따른 비용까지도 고려했다. 특히 당시 철도의 발전에 따라 철도운송에서 철도의 내구능력과 철도 위를 지지하는 버팀목까지 고찰한 마르크스의 시야에서 그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냐는 점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매우 예리학고 논리적인 부분은 고장에서 고용된 노동자가 한편으로 소비자로서 시장의 중요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 인간들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옷도 입고, 신발도 신어야 하며, 집에 살기 위해서는 건축자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다른 프롤레타리아가 생산한 노동가치물 즉 상품을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들은 생활수단을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란 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은 결국 자신들의 생존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존문제에 대해 필사적인 그들을 속임수로 속여 이익을 가로채는 악덕 자본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고용자들에게 사게 하여 그 생산품의 현재 가격만큼 고용자들의 봉급에서 공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현금화폐가 아닌 상품으로 대체하여 상품생산에 따른 잉여가치물 처분 및 노동력에 대한 유동자본 절약, 그리고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파는 것보다 더 높은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상품이 시장에 팔리기 위해서는 창고의 이동, 상품의 유통을 위한 운송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에 내놓아도 당장 팔리지 않으면 상품의 질적 가치가 저하되어 본래의 가격으로 이윤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사회에서는 이렇게까지 고용자들에게 상품의 처분을 강요하지 않으나 분명 상품을 급여 대신으로 적용한다면 고용주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투입한 금액이 상품의 재료비와 생산에 필요한 기타 에너지와 잔잔한 부차적인 자본이라는 점이다.

어째든 자본2권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통한 자본의 이동과 자본의 종류를 예시를 들었다. 농민에겐 밀은 파종을 위한 고정자본이겠으나 빵집가게에서는 빵을 만들기 위한 재료라는 유동자본이란 점은 산업의 형태와 규모,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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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
황금가지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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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의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는 정말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말 제대로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든다. 그것은 계속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매체의 확산으로 통해 인간이 거기에 대한 물질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만큼 정신적인 여유나 안락함이 증가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소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도서가 목표로 하는 것은 1980년대 미국이라는 점과 그 미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적 문제, 정치적인 현황,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런 문제, 현황, 현실을 어떻게 제대로 보고 판단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일종의 지침서에 가깝다고 본다.

마빈 해리스는 분명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줄 수 없다고 하나, 이런 일들에 대해 원인부터 찾아감으로써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아서 그것에 대한 처방이나 강구들은 독자들에게 알아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전체적으로 보는 사회를 일련의 각개의 문제로 해설해 나가는 방식은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독특한 집필방법이다.

주제는 따로 제시하나 그 주제 하나하나 읽고 난 뒤에는 그것이 하나의 큰 원으로 그려지게 되어 어느 거대한 사회적 문화적인 구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서적이다. 이런 방법으로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는 미국이란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 서적이다.

어떻게 본다면 1980년대 미국의 문제들이 오늘 날의 2000년대로 들어선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령 인플레이션 문제, 게이와 레즈비언과 같은 동성애자들, 나날이 심각해지는 폭력행위와 범죄들, 비정형적인 문화와 종교들의 행태들, 여성들의 직업참여로 통한 가정문제 등등 말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하나하나가 분리되기 보다는 일련의 과정으로 통해 서서히 그렇게 되어버리는 역사적인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전제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끝이 없는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기계 산업의 발전과 정보통신 매체의 발달은 어느새 인간이 주체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 소외시켜 버렸다. 자본주의 발달함은 인간의 물적 욕구와 사회적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막상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정신적인 안락함은 사라져 간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본국 영토에 큰 여파가 없었다. 공장에서는 여전히 기계가 돌아가고 게다가 기술의 발달로 다수의 인원보다는 소수의 인원으로 작업이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가속화로 통해 기업들의 자유경쟁이 과열화 되면서 일부 소수 대기업이 독과점을 점령했다.

게다가 인구도 늘어나고 전쟁 이후 전쟁참전자를 위해 각종 복지혜택 거기에 따른 제반 행정기구의 확대들은 국가예산을 소비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기업들의 병합과 부도, 정부기관의 몸집 부풀리기는 이른바 빚 덩어리에 앉게 되버린 공룡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기존 공장기업들이 폐쇄로 대규모 기업에서 독점적으로 생산하게 되자 적은 인원으로 일을 하게 되니 근로자들의 수가 감소하고, 여기에 남성노동력의 가치가 저하된다. 그리고 저하된 남성노동자 대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간을 상대하는 새로운 업종이 들어나자 집에서 가정을 돌보던 여자들이 사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들이 집이 아닌 일을 한다는 것은 여자 스스로의 사회참정권을 얻어가기 보다는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의 월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남편의 월급으로 자신들의 생활도 문제지만, 아이들의 부양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돈이 수십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방편으로 가사하던 여자들이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기존 남성노동자에 비해 여자들은 본래 임금의 50~60%라는 저조한 화폐만 받고, 업무환경도 개선되지 않아 결국 폭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사회적 권리를 보장함은 맞으나 단순히 그 권리로 인해 남성들의 일자리의 축소와 또 일자리에 넘치는 덕분에 화폐유통이 증가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다. 인플레이션 문제에서 기업의 장인정신 대신 한몫 잡으려는 상술은 소비자로 하여금 좋은 제품을 오래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제품을 계속 사게 하는 방법으로 변경되었다.

새로 산 토스트 제조기계가 벌써 고장이 나는지 혹은 청소기가 금방 망가지는 일들은 고객에 대한 배려감 따위는 관심 없었다. 게다가 고객들의 항의를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방관하는 태도로 소비자를 지치게 하여 물건을 계속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물건이 계속 디자인과 사용방법이 조금씩 바꾸면서 질적인 부분은 유지되고, 판매가는 예전보다 약간 올랐으나, 인플레이션으로 통해 기계에 화폐가치적인 부분은 저하되었다.

이런 불량품 공화국에 이것을 파는 점원들은 고객을 동네상인처럼 행동하기 보다는 지나가는 행인 다루듯이 한다. 그들은 고객이 단골손님이 아닌 지나가는 행위이라는 생각아래 고객이 무엇을 필요하든 말든 그저 수동적으로 다가갈 뿐이다. 기계제조업 자리가 부족하게 되자 많은 일자리가 서비스 직종으로 전환되면서 이런 폐해는 심하게 된 듯하다.

서비스 직종은 평균에 해당되는 임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종사자들에게 지불되고, 종사자들은 대부분 학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와서 일하기까지 자신의 고용업체에서 제대로 된 관리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그냥 투입된다. 이런 무분별한 상업은 소비자로 하여금 불만을 높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독과점과 정부의 중앙관리로 인해 국민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뭉개져 가는 서비스에 자신의 돈을 소비할 정도로 악화된 것이다. 가령 아스팔트가 망가짐에 따라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고장이 날 수 있고, 자동차 이외에 별도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며, 특히 장거리 이동자에겐 버스나 기차보다는 비행기라는 고가의 운송체계를 이용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항공기 이용하는데 있어 갖은 불친절, 체증, 지연 등은 소비자 즉 미국사람 하여금 지치게 만든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려 했으나, 그 욕망이 국민이 아닌 일부 큰 단체의 편리함으로 이용당하게 되어 갖은 사회적 자본이 무효화되고, 그 부분에 대해 다시 국민들의 비용이 들어가서 가계 부담 증대와 인플레이션이란 괴물을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오르는 스태크플레이션이란 변종괴물까지 탄생했다. 지나치게 과열된 사회적 문제가 결국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간을 편하고자 한 각종 기술들은 일자리에서 남성노동자를 물러나게 하고 여성노동자를 불러 모우고, 흑인들에게 여전히 직업과 사회적인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불만을 올리게 했다. 가령 범죄에서 흑인과 백인의 비율은 엄청나고 거기에 희생되는 흑인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흑인들의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 대신 사회범죄로서 직업수단을 찾는 경우가 발생된다.

범죄가 발생하니 미국에서는 낮이 아닌 밤에는 길거리를 다니기가 불편하고, 밤늦은 시간에 집에 있더라도 각종 강도나 미치광이들이 살인, 절도, 성폭행까지 이어진다. 노인들과 여자, 아이들은 길거리를 돌아 다니기가 무섭고, 이들은 언제나 범죄의 타켓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자들은 처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었을까? 각가지 사회적 문제와 현상들은 오히려 그 문제를 다시 재생산 및 재가열로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런 모습은 미국이라는 다양한 민족과 대기업의 독과점, 국가정부의 거대화 및 비능률화로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런 문제는 인간들에게 각가지 정신적 질환이나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신념이나 철학보다는 어긋난 가치관에 따르게 된다. 가령 사이비종교에 빠져 거기에서 정신적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 구원이 아닌 그저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하나의 탈출구였으나 사실 알고 보면 깊은 늪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물가는 오르고 남자들은 자신의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고, 여자들도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그들은 2세를 낳는 것을 꺼리게 되고, 이에 따라 2명 이상의 아이들을 가진 가정은 계속 줄어들고 혼자 낳아 키우거나 어느 때에는 아예 놓지를 않을 경우도 있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이성애적인 사랑에서 이제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라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성애적 사랑까지 등장했다. 남자들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부담을 가질 수 없고, 여자들도 자신이 경제적인 권리를 갖자 결혼하여 아이를 가기를 거부했다. 게다가 sex라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2세를 위한 신성한 행위라기보다는 이제는 서로 즐거움을 향응하기 위한 하나의 오락으로 되었다. 그런 정신적인 압박일까? 미국에서 게이의 증가는 상당히 놀라웠다. 게이마을이 생겨 각가지 게이를 위한 미디어, 인프라가 구축되어 쉽게 그들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인간이 평소 가지고 살아온 기존 생활방식과 규칙으로는 도저히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에 오게 되면서 인간 생활, 문화 전반에 왜곡된 이야기만 넘쳐나고 있다. 이런 무섭고 낯선 이야기들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새롭게 대두되는 문제가 없으라 법은 없다. 
 

우리 한국도 물가 상승, 화폐가치 하락이 오더라도 임금수준은 여전히 차이나고 차이나면 날수록 저임금자에겐 힘겨워진다. 게다가 남성들이 산업 전반에 투입되다가 남성 혼자 벌기 어려워 여성들도 투입되고, 이런 문제로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가 적어지는 사화 고령화 현상까지 일어난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서비스업종이 육체적으로 덜 피곤하더라도 오히려 정신적 심리적 피로는 증가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계를 다루고 있는 사람은 결국 기계에 의해 수동화 되지만, 그래도 기계가 아닌 사람을 만나면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여지라도 있으나, 인간을 인간 그자체로 기계적인 일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여지까지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면서 다양한 인간사회에서 우리는 오늘날을 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답은 없다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여 내가 지금 단백질로 구성된 지능을 소유한 동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를 잃지 않고 다시 상기 시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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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Ⅰ-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1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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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친한 누님이 한분 계시는데, 그 누님이 몇 년 전에 결혼하여 같이 살고 있는 신랑은 기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엔지니어다. 그리고 그 남편 되시는 형님의 회사는 국내 기업이 아닌 외국계 업체로 알았다. 그때 내가 알기로는 독일계 회사로 몇 년 전에 형님과 그 누님  두 분이 독일에 잠시 업무상의 사유로 잠시 이민 갔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는 컨테이너 화물선박에 배의 엔진을 손보던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와 그 형님의 접점은 친하게 지내는 가족들의 친분이란 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보자면 둘 다 노동자라는 것이다. 전자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노동자고 후자는 전자의 기술력보다 약간 낮은 난이도이나 상당한 육체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직업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간에 그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유럽은 특히 독일은 기술자들을 우대한다고 말이다. 기술자가 우대받고 기술자의 힘을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다. 지금 나 역시 공대를 나와 공학 엔지니어를 하고 있지만, 다른 점은 기계를 직접 설계하고 만지는 것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공학을 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환경이란 직종은 기계와 인접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기계와 인접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다.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노동력으로 뭐든지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나는 육체적 노동 대신 정신적인 노동을 한다. 그런다고 육체적인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 가서 조사하고 그 현장까지 가는 거리만큼은 운전으로 노동력을 생산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중요한 점은 이 노동력, 그 중에서 공학(工學)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에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독일의 기술력을 극찬한다. 왜 그렇게까지 극찬하고 인정하는 것일까? 독일하면 보통 벤츠라는 고급승용차를 떠오르게 된다. 튼튼한 차구에 좋은 승차감 그리고 힘이 넘치는 엔진, 그 모든 산물들은 결국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력에서 독일이라고 처음부터 이런 노동력을 가진 기술자가 인정받았을까?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였다. 과연 그런 대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 그리고 긴 여정 속에 묻어져 있었던 역사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독일의 높은 기술력 뒤에 숨겨진 그들의 능력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결국 그것을 생산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가 아닌가? 기계를 설계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공정까지 준비하는 그들이 말이다. 이에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공장이나 건설현장의 인력들은 독일처럼 그렇게 우대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히려 근로라는 것이 3D(Dirty, Dangerous, Difficult)라는 난감한 문제 속에 3박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령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근로환경 문제로 안전저해, 임금체불, 근로시간초과, 비정규직 등의 문제가 가끔가끔 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런 힘든 일은 하는 노동자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경위로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 어떤 현상들까지 일어나는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산업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생각을 해본다면 오늘 우리가 회사를 갈 때 차를 타고 가는데, 차를 만들려면 자동차 공장이 있어야 하고, 길을 걸어가려면 보도블록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차를 만드는 노동자와 보도블록 벽돌을 만드는 노동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노동자에게 하나의 생산품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동차는 알루미늄이나 철과 같은 자재가 필요할 것이고, 벽돌은 시멘트나 모래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당장 중단되어 버리면 사회적으로 일부 혹은 대다수 범위의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듯 하게 보이는 이들과 이들의 노동이 결코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그런 사회적 혹은 개인적인 인프라 및 재화를 누리려면 누군가는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그 생산에 있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리엔 물품이나 그 물품의 가치척도를 나타내는 화폐단위만 관념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런 물적 가치에 대해 나는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적는 순간에 조금이나마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이유는 칼 마크르스의 “자본 1-1”을 읽었기 때문이다. 다소 경제학 용어와 사회과학적인 용어로 통해 솔직히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책이라도 항상 비판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 현실을 고찰하는 마르크스의 필체는 150년 훌쩍 넘은 이 시점에 와서도 이 책이 과연 오래되었다라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한 그런 공산주의 선언들은 본래 취지는 노동자의 인권과 인간 평등이라는 정의로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소비에트 스탈린 폭력적인 정권과 북한의 주체적인 사상으로 인해 마르크스가 제기한 그 사상이 변질되어 이상하게 오남용되었다. 사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글들은 오히려 북한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단지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가들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는 이유로 그렇게 왜곡되어 갔다.

이런 부분은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메카시즘이 일본과 한국으로 전파되어 그 갈등을 부추이고, 북한과 소련의 불법군사행위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실 내가 알던 어린 시절의 마르크스는 볼온 서적의 1순위이었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내가 듣기론 당시 절대로 보면 안되는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르크스의 사람이 근현대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과 동맹관계를 맺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서독)까지 마르크스의 학문적인 영역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작년에 보았던 영국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 편에서 나는 경악을 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 전혀 다르게 나에게 받아들인 것이다. 최근에 읽은 현대사상 88에서는 마르크스가 미친 현대사상이 얼마나 큰 업적을 발휘했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마르크스는 그야말로 니체와 프로이트와 더불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마르크스에 대해 원전으로 알아 가기 보다는 주변 도서로 통해 나는 마르크스를 알아갔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의 서적이 어떤 내용으로 적혀 있는지 이번에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본 1-1을 내 손 위로 잡아본 것이다. 읽어보면서 나는 정말 경악을 했다. 아니 과연 이것이 당시 유럽사회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인가에서 말이다. 자본이란 것은 경제와 국가를 부흥하게 해주겠지만, 그 자본이 인간의 도구로서 움직이는가? 아니면 자본에 의해 인간이 도구로 움직이는 것인가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본은 윤리를 가지지 않았다.

자본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학대했다. 아직 나이가 10대인 어린이와 청소년이 극심한 노동으로 인해 죽어도 이 자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10만의 사람 수에  26,000명이 죽어가도 그것이 멈추기보단 그저 계속 흘러간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인간의 노동을 흡수하여 그들을 폐인처럼 만든다.

게다가 성인남성들은 높은 임금이 간다고 하여 나이어린 어린이와 힘없는 여자까지 동원하여 기계 앞에서 12시간 넘는 과잉노동에 대해 합당하다고 하는 비윤리적인 태도에 나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아동들에게 12시간 동안, 그것도 악취와 먼지, 각종 질병과 위험, 재해 등으로 가득한 곳에서 일하게 한다면 바로 엄단의 처벌이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부당한 처사는 당연시 되었다.

오히려 나이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일하게 하여 부모들의 쌈짓돈으로 우려먹은 것이다! 아마 그런 이유는 그 부모마저 그런 윤리적 가치관을 상실했다는 증거다. 왜냐하면 그들도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제대로 살아왔기 보다는 매일 힘든 노동과 그 노동 속에서 나오는 각종 욕설과 비난 게다가 인간 심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단순작업과 비인간적인 태도 정말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일까!

어느 공장에서 방 1칸에 남자 어른, 어린 소년과 소녀가 같이 자고 먹고 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온 몸이 먼지로 머리와 얼굴은 흙으로 쌓여 일이 끝나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로 간다고 한다. 그리고 성적 문란으로 인해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구절에서 인간의 타락은 인간 스스로의 문제도 있지만, 그 사회적 주변적 환경 여건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가난으로 피폐해진 육체와 정신으로 자기 아이들까지 그런 고통을 고스란히 준다.

물론 그런 고통도 주면서 자기 자신도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 공장에서 각종 안전시설 미친 가혹한 노동조건은 폐병과 각종 전염병(넝마를 분리하는 사람들)으로 대중을 병들게 한다. 이런 가혹한 노동은 결국 농업기반 산업에서 공업기반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물적 풍요를 줄 수 있을지도 몰라도 인간 그 자체의 삶과 가치는 저해시키고 타락시키게 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렇게 열악하게 살아가고 그런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태어난 공장법은 효용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왜곡되어 가는 현상을 보는 나로서는 오늘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노동현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조금 다시 반성하게 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저때보다는 훨씬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전 산업현장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이 한참일 때 가혹한 노동이 심했다. 하루 12시간 넘는 공장에서 기업에서 이윤을 취하기 위해 어린 여공(그들은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에게 일감을 맞추기 위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도록 각종 행패를 부렸다. 게다가 임금까지 밀리고, 산업재해로 죽거나 다쳐도 무방비로 내치었다.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인간은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인격이다. 인격을 가진 하나의 생명이 그저 기계 속에 박혀 있는 톱니바퀴처럼 돌기만 하다 결국 마모되어 버려지게 된다면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옳은 일인가? 사회가 돌아가고 경제가 돌아가려면 물론 누군가는 그런 힘든 일을 하고 각종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 노동하는 주체에게 부당한 대우로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옳은가?

마르크스 자본 1-1편을 읽어본 나로서는 인간이 그렇게 망가져 가는 것이 그저 한숨 이외에 그 어떤 것을 대체할 수 없었다. 어째든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그래서 상당히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금 재미난 부분은 이 책에서 존 스튜어트 밀(공리주의자)이 얼빠진 경제학자라고 말하는 점이다. 그는 학식이라는 거대한 명칭에 얽매인 사람이란 점이다. 하기사 존 스튜어트 밀은 시민사회를 논했다면, 니체는 대중사회를 논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논한 노동자는 당시 영국 및 유럽의 대다수의 국민이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공감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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