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비교역사 문화총서 2
강만길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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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는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근대사의 지식으로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운 책인 것 같았다. 책 속에 단순히 한국의 근대사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근대사까지 다루었으며, 게다가 그 다루는 연구 내용에서는 다양한 학문의 범주까지 넘나들었다. 일단 역사를 안다고 해도 당시 사회학적인 배경이나 정치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사라는 것이 크나큰 사건과 중요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에는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대세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가지 않을 경우 많은 어려움에 봉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생활을 했다는 점에 넘어 이 식민지 생활과 더불어 다른 국가에서는 어떻게 식민지를 통치하고 그들은 어떻게 우리와 다른가까지 판단하는 것은 많은 학술적인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은 외국의 경우다. 물론 일본이 행하던 조선의 불법침해 행위도 중요하나 그것이 어떻게 외국과 다른가라는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인도, 프랑스에서는 베트남, 미국에서는 필리핀이다. 현재 이 모든 나라들은 자치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이나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국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하고 통치받던 그들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졌다.

 

물론 그들이라고 억압을 받고 학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나라 모두 잔혹한 탄압을 거치고 있었으며, 당시 세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유입에 따라 국내 경제와 사회가 피폐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보다 덜 한 탄압을 받음 셈이다. 가령 서구사회에서는 비서구적인 문명권인 동양, 아프리카, 제3세계에 대해 아주 우월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한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영향으로 서구사회는 자신들이 속한 '서양적'이라는 것에 대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라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리고 동일시하는 반면에, '동양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서양식’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 명상적, 신비적' 이라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서구 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편견이다.

 

그런 오리엔탈리즘에 따른 서양문화가 동양문화에 접할 경우 이들은 모두 미개하고 열악한 문명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문화에 어울리는 동양 속의 서양을 만들기를 바랐다. 영어, 프랑스 등을 전파하여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적으로 납득하도록 하게 했으며, 이런 언어의 소통을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적자원을 유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자신들의 우월한 문화적인 요소를 상대방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

 

게다가 서양문화는 동양문화와 많은 차이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동양 자체적인 문화를 인정하였다. 그 인정은 너무 상이한 문화적인 영역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지형적인 위치와 그동안 살아온 풍습들을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후퇴한 문화를 내버려두고 유지함으로서 그들의 반감을 사지 않고, 단지 경제적인 이익을 바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많이 달랐다. 일본은 서양국가와 달리 동양문화권의 나라가 동양문화권 속의 나라를 침탈했기 때문에 비서구적이라는 동일한 공통특성이 있었고, 더 중요한 부분은 자신들은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서구문화를 일찍 받아들인 국가인 만큼 서구화가 가장 먼저 이룬 동양국가이었으나 한편으로 서구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야 할 국가였다. 자신들이 서구화를 받아들여 그것에 동조되어 군국주의적인 침탈행위를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존재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의 망언 같은 군사 및 외교전략 중에서 아시아의 탈서구화라는 것이다. 즉 대북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망상에 젖어 서방국가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침탈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것이다. 조선침탈에서 중요한 사실은 일본은 조선이란 국가와 비교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고 좋은 점을 부각한 반면 조선인에겐 자신과 전혀 반대되는 것만 부여했다. 정한론에서는 조선을 침탈하여 지배하는 것이어야 말로 일본과 조선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란 허구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후반에 엉뚱한 일들이 생긴다. 1937년 대동아전쟁에서 일본군들은 계속 전쟁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조선인들은 일본군으로 보낸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믿음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로 봤다. 그러나 갑자기 황국신민관을 내세워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일치한다는 내선일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통하지 못한 점은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처음부터 배격하고 차별대우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양에서 넘어온 국가들은 처음부터 인종의 차이에서 괴리감을 인정했다. 머리색, 피부, 동공, 키, 골격, 언어권까지 말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그렇게까지 많이 닮은 것은 아니나, 적어도 머리색, 동공, 피부색, 언어권에서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물론 동양권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하여 집단적인 군국주의 교육을 실시했지만, 중국과 대만에 비교하여 조선이란 국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치밀하고 잔혹하게 굴었다는 사실이다.

 

본래 일본은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굴지 않았으나 1936년 2월 26일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서 일본 정치권에 군사적인 형태로 발달하고, 이들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로 변경된다. 문제는 이들이 되고 나서 한국어 즉 조선어에 대한 탄압과 창씨개명, 황국신민화라는 파시즘적인 군국주의에 물들어간다. 이전에는 조금 다른 사실이 발견되어 조금 흥미롭다고 할까나? 왜냐하면 군국주의에 빠져 전쟁을 일으키는 파시스트의 국가에서 맨 처음 조선인들의 의식 해체가 너무 이율배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Bentham, Jeremy)의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自由論)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를 외친 것이다. 이 두 명의 철학자는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로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철학을 설파한 사상가이다. 그렇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동인도 주식회사에 근무했고, 문화수준이 낮은 인도에 대한 영국통치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까지 잔혹하게 무력의 탄압보다는 무역으로 통한 경제적인 정책을 중용했다.

 

즉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권에 대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자본의 크기에 따라 자유가 다르다는 것처럼 자본자유주의였다. 그래서 그들을 문화적으로 탄압하는 것보다 그들과의 교역에 따른 이익이 더욱 좋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존 스튜어트 밀은 인권적인 부분에서 인간생명의 가치를 중시했다.

 

그런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강조한 영국의 철학사상이 어떻게 한지 일본에서 조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 이유는 일본이 조선이 가진 사상 즉, 유교사상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군주가 존재하는 국가에서 조선인들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중시하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고,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해지면 애국심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약간 이상한 흐름으로 연결되어 일제에 오히려 역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다.

 

1919년 3월 1일에 열린 평화시위 삼일절행사를 본다면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면서 고종 독살의혹에 대한 의심과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탄압에 따른 반발행위가 삼일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운동 자체가 일제에 대한 반발의식 근본에 자유주의가 있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 침해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천부인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게다가 1919년의 2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차르왕족이 레닌-트로츠키에 의해 무너지는 큰 혁명이 발생하여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차르왕족을 전복시킨 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레닌과 트로츠키이었으나, 그들은 자신이 혁명의 지도자로서만 있었지, 혁명의 주체는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과 여성들이었다. 무능한 왕족을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 내지 사회주의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다양한 부류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더 이상 조선인들을 무력통치로서 상대하기보다는 무력 이외의 문화통치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적인 순간들이 바로 1937년 이후고 1942년 태평양 전쟁에 전황이 급할 때 더욱 심각했다. 일본이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의 괴뢰정부 만주국과 만주국 넘어 중국, 대만, 미얀마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그 교두보가 조선이었다.

 

군수기지 및 시설의 유지와 철도와 도로를 통한 물자이송에서 조선만큼 좋은 전략지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반도형 국가 즉 섬과 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이기에 큰 착취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가령 미국의 경우 필리핀을 정복했으나 2차 대전 이전에 철수하려 한다. 그 이유는 필리핀에다가 미국식 자본주의 경영을 도입하려 했으나, 그것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 멀리 있다는 점과 거기에 투자를 해도 원금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사적인 전략기지로서 효용이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필리핀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태평양 중앙에 군사전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게 되고, 태평양을 관통하여 미국본토로 적군이 올 수 있다는 예상이 있었다. 따라서 필리핀에 경제적인 투자와 수탈, 군사적인 배치를 실시하지 않았다. 단지 시간벌기 식의 군사적인 조력만 했을 뿐이다.

 

이와 다르게 영국은 인도인들을 이용하여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토록 한다. 영국인들은 인도에게 자치권을 준다는 약속을 하고, 많은 인도병사를 선발하여 전장에 참전하여 수 십 만 명이 죽게 했지만, 그 약속을 어긴다. 인도의 평화주의적인 독립운동가 간디가 영국에 대항하여 반폭력 시위가로 활동했으나, 1차 대전 시에 영국의 약속에서는 무력참전을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참전 후에도 인도인 군사들에게 큰 혜택이 가지 않자 아주 소수의 초급장교를 인도인으로 올려놓고, 인도라는 국가는 다양한 종파와 세력이 있어서 이들을 각각 다른 군대에 편입하여 서로간의 경쟁심을 올리고, 심지어 인도 카스트 계급사회까지 이용하여 서로 분열시키려고 했다. 이런 방법들은 일본 역시 사용했다.

 

물론 군대 안이 아닌 착취의 수단으로 말이다.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지만,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도 일본이나 조선 안에도 제3차 공산주의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 일명 코민테른(Comintern) 조직원이 활동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내의 노동자는 매우 열악했다는 점이다. 가령 공장 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노동시간을 보면 조선인이 1일 12시간 이상이 많았고, 급료도 일본인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게다가 공장법까지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인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작은 월급, 심한 착취, 심각한 노동환경에 대해 조선인들이 파업했으나 일제는 경찰과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했으며, 이것보다 더한 방법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조선인들과 경쟁을 붙였다. 중국인들은 조선인보다 더 작은 금액에도 일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동원되어 공장에서 근무했는데, 어린아이의 경우 어른의 25%를 주어도 아직 어리므로 반항하지 않았으며, 심각한 노동착취를 해도 문제되지 않았다. 아이와 여자의 노동으로 남성노동자의 가치가 저하되어 1인 남성의 월급으로 2~3명의 여자와 어린아이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런 부분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도 나온 내용으로 당시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할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일제시기에 통용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마르크스주의가 조선에 유입되어 독립운동을 한 것만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와 더불어 자본주의가 활성화되어 거대한 자본가가 영세농민의 토지를 수탈하여 일본 내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조선인들은 그 일본인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노동착취를 당한 점이다.

 

이런 문제를 일으킨 사실에선 교육도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한글을 사용할 경우 심각한 탄압을 실시했다. 게다가 일어를 국어로 하였고, 각종 일제식민사상을 주입했으며, 교육의 기간도 일반 일본인과 달리 적게 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기술이나 학문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다. 단지 일제에 충실하고 무식한 조선인만 원한 것이다.

 

그런 불평등을 기초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2등 국민인 조선인들에게 동일한 전쟁용사로 참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자기가 스스로 자원하여 장교로 임관한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 사병으로 억지로 끌려 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합리화하여 파시즘적인 군국주의를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패망한다. 물론 패배의 원인은 연합국과 미군의 참전도 있지만, 전쟁의 수행에 있어서 황국신민을 강조하던 일제가 겉으로는 강요해도 결국 차별화한 것 자체가 모순이란 점이었다.

 

이에 반해 유럽과 미국의 식민국에서는 겉모습이 다르고 문화적인 이질감이 크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선일치를 강조하지 않았고, 그냥 그 나라의 풍속에 자신들의 문화를 주입하는 식이었다. 결국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서구와 다른 것을 같다고 말하면서 결국 다르게 차별한 일본의 식민통치 방법에서는 일제가 이중적인 통치방법이 결국 자신들의 모순으로 이어졌다. 서구의 경우 그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보다는 그 민족의 국가를 경제적인 교육으로 이익을 도모했지만, 일제는 그 민족 자체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거는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종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종으로 삼으려 해도 동일시하자는 구호는 역으로 반발감을 주었다는 점이 이 책에서는 강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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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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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자신문과 가난한독자, 이 책은 다소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책이다. 보통 신문의 기능을 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신문(新聞) 그것은 새로운 것을 널리 알리는 도구이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TV, 전화, 휴대폰 등의 미디어를 접촉할 수 있는 도구가 있으나, 적어도 이런 체계들이 없거나 아직 실용화되지 않았다면 정보의 필수적인 도구는 사람과 대화함으로써 직접 알 수 있는 대화(對話)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사람의 눈으로 정보가 가능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은 사람이 직접 대화하는 것보다 담을 수 있는 정보량이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사람과 사람이 대화할 수 있는 것에서 사람의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며, 그 한정된 시간에 말을 계속 할 수 있는 체력의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오로지 시각적 정보다. 시각적 정보는 말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관리할 수 있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그런 정보의 공간적인 체계를 담을 수 있는 정보체계가 바로 신문이다. 이전에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신문의 위력을 본 적이 있었다. 신문의 복제로 통해 사람들을 주술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충분히 가능하다. 신문이란 정보매체가 진실 된 보도가 아닌 거짓된 허위정보로 채우거나 또는 왜곡 내지 허황된 소설로 지어내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것이 거짓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특히나 신문은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정보체계이므로 청각적 정보처럼 인간의 무의식적인 부분을 건들기 보다는 이성적인 영역에서 더욱 강조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판단능력 즉 이성적인 사고 관념까지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신문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정보의 매체와 더불어 그 매체는 미디어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전가할 수 있는 점이다.

 

특히나 문자라는 언어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체계에서 기존 인간들은 문자에 대해 잘 몰랐다. 가령 중세유럽에 자국어로 성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라틴어로서 기술했다. 만약 자국어로 성격을 보거나 번역할 경우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심하면 심지어 인간의 생명까지 그냥 빼앗을 수 있는 점이다. 언어라는 것은 지식을 담은 하나의 방법이므로, 언어는 곧 지식이고, 지식은 일부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기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문자와 언어가 대량적으로 유포되면 어떻게 될까? 기존에 언어는 일부 엘리트만 허용되었다. 어려운 라틴어가 성격으로 되어 있다면 교회의 권위에 응대할 수 없다. 또한 과거 한국역사에서 조선시대 상황을 봐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서를 한글 즉 훈민정음이 아닌 한자로 되었다는 점은 글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란 것을 의미한다. 한정된 자들의 문자체계에서 지식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식은 권력이고, 권력은 지식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다면 지식의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언어의 순환화로 통한 지식의 전파가 신분체계를 바꾸는 것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하여 사회적인 인식 그 자체가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배우게 하여 한정적인 부분만 배우는 것으로 세뇌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의 기능을 사람들의 인식이나 의식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으면 이것만큼 무서운 방법은 없다. 미디어라는 것은 사실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권력의 원하는 바가 대중 통치라는 것이라면 더더욱 심각하다. 가령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국가권력보다는 미디어가 훨씬 유용하다"라는 문구처럼 미디어로 통한 정신적 통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런 문제를 언론의 양심적인 행위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정치적, 사회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바로 여기 “부자신문, 가난한독자”에서는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지난날의 추악한 모습을 지닌 신문사들의 악행들을 고발한다. 제일 인상 깊은 모습은 현대사회에 와서 최고의 독재자 전쟁광으로 평가되던 히틀러가 나왔다.

 

어느 신문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히틀러에게 히총통(總統)이란 단어와 더불어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외치고 있어 우리도 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독립주권도 가지지 못한 채 징용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그것을 만든 기사매체에서는 관동군으로 가는 것을 독려하고,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 대해 영광된 죽음이라고 하고, 심지어 그의 가족까지 당연한 대장부의 도리라고 한다.

 

그런 부당한 행위를 한 신문사를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자면 우리 민족에 대해 과연 도움이 되는가 마는가에서 정상적인 이성능력을 가진 사람일 경우 반드시 의문을 품는다. 1932년 이봉창 열사가 독립투쟁을 하는 기사에서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그런데 그 이봉창 열사를 비난한다. 그런 신문사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사는 회사로 변모했다.

 

이것이 합리적인 결과라고 보는 것일까? 시대적으로 사회진화론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보자? 그런 행동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신문, 일제의 억압받았다고 하는데, 1940년 대동아전쟁에서 당시 돈 100만원이나 집어먹고 폐간된 것이 일제의 억압이라고 한다면 돈만 먹고 적당히 말을 돌리면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선발주자로 사기 치는 것을 간단히 속일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100% 객관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렇게 한 사실에 대해서는 100% 사실이다. 누가 그렇게 보던지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사회진화론적으로 당시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지금 시대적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적으로 본다면 당장 사라져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다.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그러면서 뻔뻔한 거짓의 과거 신간회를 찾는 그들에게 가난한독자들은 언제까지 그들을 부자신문으로 만들어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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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상 - 2월혁명의 발발과 이중권력의 수립
레온 트로츠키 지음, 최규진 옮김 / 풀무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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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어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란 소설은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다. 동물농장이란 소설에서 모든 동물이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서로 대화도 하고 소통을 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이른바 국가체계까지 발달한다. 멍청한 주인의 무능력한 농장운영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봉기를 일으키는 모습에서 이것이야 말로 러시아 혁명을 비꼬는 하나의 풍자로 보였다.

 

그런 러시아혁명의 중심이 되던 인물은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정신을 승계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비에트의 기본인 볼셰비키당을 건국하였고, 그의 목표는 불운하면서 어리석은 동물농장의 주인인 차르왕국을 영원히 업소중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동물농장처럼 늙은 돼지 메이저는 이미 죽어버렸으나, 영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버지로서 나타난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의 돼지 얼굴은 나폴레옹이란 난폭한 돼지에 의해 어설프게 선전에 사용된다. 그것은 마치 스탈린과 북한 괴뢰정부를 만든 반파시스트로 위장한 파시스트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현재 병행하여 같이 읽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문구가 살짝 생각난다. 사회(민주공화)주의 혁명에서 왜 진정한 사회(민주공화)주의로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사회가 노동자와 농민이 억압당하는 사회가 보통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일 경우 경제적 낙후와 제3세계라는 점에서 기존 강대국에 의해 착취를 당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적인 이념으로 운동해도 결국 그것이 민족주의로 연결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들의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초기에는 진보적이나 보수적으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잡한 세계정세에 살아남아야 하는 점, 국민 대부분들이 지금 현재 어려운 실태에 대한 대응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악독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혁명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공화적인 국가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본다면 러시아의 혁명은 너무 낙후된 국가경제와 사회, 게다가 1905년 1월에 발발한 피의 일요일 전후로 러일전쟁이 있었다.

 

러일전쟁에 러시아의 패배, 그리고 그 뒤의 차르정권의 무능함과 부패함은 러시아 국민에게 절대적인 불만을 사게 했다. 그런 와중 국민들은 비극적인 피의 일요일 당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시위를 벌였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잔인한 대학살로 마감한다. 러시아의 제1의 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제2의 혁명인 1917년 2월 혁명은 새로운 계기로 이어진다.

 

바로 그 피의 일요일에 시작된 러시아의 숨은 군중들의 분노와 자유가 터진 2월 혁명 그 자리를 계속 지켜보던 레온 트로츠키가 적어내린 것이 러시아 혁명사이다. 이 책 표지에 걸린 레온 트로츠키와 주변에 있는 볼셰비키 요원 속에서 조지 오웰 문학소설 동물농장의 스노볼은 그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다. 사실 레온 트로츠키 사진을 이 책의 흑백으로 보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의 모습은 수염과 흰 머리로 이미 나이가 많이 찬 노인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청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당장이라도 ‘나는 앞으로 뛰어 가겠노라’라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빛을 가진 만큼 그의 인생은 과연 그러하다. 1929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940년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고향에서 아주 떨어진 멕시코에서 살해당할 때까지 그의 혁명적인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마르크스의 제1의 인터내셔널, 엥겔스의 제2의 인터내셔널 , 레닌의 제3의 인터내셔널이 그리고 스탈린의 의해 와해된 제3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제4의 인터내셔널을 수록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동물농장”을 읽다보면 스탈린의 돼지화신인 나폴레옹은 자기 농장의 동물들에게 평등을 외치나 그들에게 오히려 가중된 노동과 가혹한 전제주의적인 경찰국가를 수립한다.

 

사실 차르에 의한 러시아조차도 무능한 차르와 주변에 있는 빈대 같은 악랄한 정부 관료들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위해 경찰국가 체계와 더불어 비밀경찰을 투입한다. 게다가 비밀경찰이 볼셰비키에 잠입하여 보고할 정도이니 얼마나 정부의 무능함을 상기했을까? 그런 러시아에서 트로츠키가 보고자 하는 러시아 혁명은 매우 독특하다. 이 혁명의 주체는 볼셰비키가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였다.

 

볼셰비키의 역할은 그저 작은 화약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알리는 선전가요, 협의주체였다. 하지만 혁명은 그들에 의해 발발한 것이 아니다. 차르 왕조의 알렉산드로 3세는 무기력하고 감흥 없는 무감정의 왕이었다. 따분한 일과와 그저 평온함을 추구한 이 어리석은 차르는 사이비종교에 빠지고 점술에 의지했다. 특히나 러시아 벌판에서 찾아온 수도승 라푸스틴에게 의지한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바보와 같았다.

 

라푸스틴에게 의지만 하면 권력은 금방이라도 떨어졌다. 사기꾼들이 법무부와 각종 정치 조직의 고위 관료 직을 차지했다. 신앙심조차도 없는 러시아 종교인들조차 러시아 정교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허울 좋은 자리에 의지해 자기 잇속만 채웠다. 이런 공간에 국민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괴로워했다. 식량과 연료가 없는 국민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공장은 파업으로 치닫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던 어머니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느 순간 여성들 그 자체가 혁명의 중심부였다. 기억나는 장면은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 심한 슬픔과 고통을 받은 병사에게 여성들은 어머니요, 애인이요, 여동생이요, 아내였다. 병사들의 총구에 하나의 꽃을 피우게 한 것이다.

전쟁에 끌려간 그들은 다른 동맹국을 위한 방매막이와 총알막이가 되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전쟁터에 갈 때 그들이 정확한 정보작전이 아닌 그저 무능한 이동이 얼만지, 저녁에 밥을 얼마나 주지 않았는지 세고 있었다. 신발은 굽도 없고 의복만 부실하였으며, 그런 무능한 장교로 인해 수백만에 이르는 러시아 청년들이 비명횡사했다.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오로지 따뜻한 가족이 있는 집이었다.

그들은 죽기보다는 살아 있기를 바랐다. 죽기 위해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런 병사들이 처음에 구속을 당했으나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류했고, 거기엔 마음의 안식을 주던 여성들이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지나 이제 죽음 앞에 저항하기 위해 이들은 1917년 2월 혁명의 소용돌이로 흘러간다. 이런 모습을 레온 트로츠키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적 주인공이 이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름도 모를 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며 이 책을 적은 것이다.

 

물론 이 후에 중간에서 차르에게 손을 던지고, 볼셰비키에게 손을 넌지시 던지는 간활한 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계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결정한 기관이었다. 문제는 1924년 레닌의 죽음과 더불어 트로츠키의 정치적 몰락과 망명이 큰 타격이었다. 전에 읽어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그 당시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러시아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공간인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독일로 돌아가고, 트로츠키가 쫓겨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터 벤야민은 독일 나치즘에 대한 저항 심리와 우울함으로 자살을 택한다. 그래도 적어도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있던 공간이다. 작은 시장 길에 수많은 행상들, 공연장에 많은 사람들, 발터 벤야민이 좋아하던 러시아 인형, 그리고 그가 혼자서 열령히 흠모하던 지적인 여성 아샤, 그런 모스크바의 일기들은 트로츠키의 몰락으로 끝나 버린다.

 

그렇게 아쉽게도 그의 추방과 망명에서 러시아의 자유는 검게 물들어 갔으나, 그가 하고자 했던 일들은 결코 헛된 일들은 아니었다. 비로 그가 이상주의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의 이상적인 모습은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꾸자 하는 이상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란 돼지가 있어서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체계에 대한 풍자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 작품은 트로츠키를 내쳐버린 러시아와 더불어 트로츠키가 바꾸고 싶은 그 세상마저도 풍자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왜 돼지인 나폴레옹은 4발이면서 2발로 서서 인간의 옷을 입고 옆 동네 농장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을까? 왜 나폴레옹과 같이 술을 마시던 농장 주인들은 인간이면서도 영화 동물농장의 암캐의 눈에 돼지처럼 보였을까? 돼지처럼 변한 인간, 인간처럼 행동하는 돼지는 마지막 장면에 모두 사라졌으나, 희망은 아직 존재한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죽었을망정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가치관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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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4 -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4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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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 4번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한국은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라는 점이다. 이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면 될까나? 처음부터 누군가에 대한 강제적인 방법과 조치가 동원되어도 그것의 시작과 동시에 끝을 결말내지 않은 부분이 그렇다.

 

1980년 광주시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서 어느 사람들은 혁명과 운동, 혹은 반란 내지 폭동이란 말이 오고간다. 누구의 시선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사라는 잔혹한 이야기들의 기록들은 언제나 승자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내준다. 즉 패자의 역사는 기록되지도 혹은 되더라도 그들의 원래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로 기록된다.

 

그 최고의 긴장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큰 상처 속에서 최초 발포자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아니 현장 지휘관이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에게 전면에 향하여 발포하라는 명령 이전에 그것을 지시한 그 이상의 존재 역시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미궁이다. 결국 죽은 자와 죽은 자의 가족과 친구, 또는 죽였던 자와 죽였던 자의 옆에 있던 사람 모두 피해자로 남게 되는 오명을 안고 간다.

 

총을 맞거나 혹은 심한 폭력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당시 그 운동을 참여 여부를 따라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있었기라는 광기의 살육 속에 사라져갔다. 죽은 자의 무덤에서 말은 없다. 하지만 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영광이 될 것이다. 흔히 상처는 영광 내지 훈장 또는 상징으로 통하기도 하다. 희생양이란 존재는 최고의 악인과 동시에 최고의 행동가라는 2가지 딱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아간다. 우리는 이런 세계에서 급격한 민주주의 사회를 맞이했다고 하나, 사실 유럽의 민주주의 역사에 비해 그 짧고 짧은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차라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현명하듯 하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사실이다. 사실 공화국이란 존재에 따라 국민이 주권이 아니라 군왕이 정치지배자이여도 공화국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전쟁으로 인해 국민이 신체적, 재산적, 심리적 피해를 입거나 혹은 그런 전쟁에 따른 부담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전투무장은 필수불가결적인 정치적인 행위다.

 

전쟁은 결국 정치적 형태의 가장 물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과 더불어 변화되는 사회적 정세는 매우 어렵고도 난감하다. 왜냐하면 전쟁의 결정권을 내리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원에 비해 전쟁으로 인해 휘말리는 사람들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곧 국민의 의지와 달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쇼이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병사들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객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직접 전투에 임할수록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라 전쟁의 방관자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리스 폴리스국가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 가서 국가를 지키고, 그 권리로서 정치체에 대한 참여가 오히려 더 민주주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정치적인 입장과 차이, 거기서 벌어지는 현상에 따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많은 고개를 넘고 넘어야 했다. 4번째 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비극이 인상적이다.

 

미국하면 뭐라고 할까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전쟁에 의해 위기에 빠질 때 목숨을 걸고 방어해주었다. 많은 젊은 미국인들이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관에 의해 뼈를 여기에 묻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고한 가치관과 달리 그들을 이곳에 오게 한 정치적인 영역은 달랐다. 한반도란 위치는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힘겨루기하기가 제일 좋은 곳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안정이 안되어 있으며, 미국과 소련이란 국가가 어떤 나라인지 파악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좋은 일은 있다면 나쁜 일도 있다. 전쟁터에서 분명 북한 괴뢰군들을 저지하고 올려 보내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최소한의 민주주의 국가로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좋은 일이 있듯이 나쁜 일도 있다는 점이다.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민간인 살인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책에서 우리가 감추고 싶은 기억을 다룬다. 한국에서 조선역사는 무척이나 많이 다루어도 근현대사를 다루고 싶지 않아 한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사회적으로 상당히 영향을 미치는 부류가 여기에 많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알아가는 것은 보이고 싶은 부분도 있겠지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이란 남을 짓밟고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심과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많은 일들을 자행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에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그 지배권은 대한민국 정부고 대한민국 국방부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시 작전통제권은 미군이다.

 

물론 많은 전투물자와 장비가 주한미군의 영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주한미국이 전시 작전권을 지배하는 것은 국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납득하기가 조금 힘들다. 이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명이나 청에 충성을 다하고 털리고 있는 조선과 비슷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갑차 소녀의 죽음에 대한 문제, 무참하게 맞거나 겁탈당하거나 심지어 폭행으로 죽은 사람, 그 밖에 많고 많은 범죄문제와 그 외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을사조약과 경술국치일까지 당하게 되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농락을 당했는가? 가다가 맞아도 고발할 수 없고, 조금만 대들어도 퇴학에 감금에 폭력에 시달렸다. 그것이 아직까지 반일감정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란 나라에서 미묘하게 그 감정이 밀고 당긴다. 물론 미국 내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유와 평화가 자신들만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 이외에도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정치적인 이해로 외교를 하거나 혹은 이런 문제를 의문시하는 경우 강제적인 제압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른바 귀에 걸면 귀걸이와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 교육에서는 역사와 철학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역사를 알면 수치스런 부분을 들켜 곤란한 사람이 있고, 철학을 알면 정치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역사적인 사실근거와 거기에 따른 사건들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역죄로 몰려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당하고 살았던 점이다. 어느 날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바로 그 사람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 앞잡이로 독립군을 잡고 고문하던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경찰에 들어가 권력으로 횡포하다가 과거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정치적으로 숙청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대와 더불어 625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의 공안정국까지 말이다. 당시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나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니라면 최근에 오히려 한국이 일본 치하에 들어가서 계속 그 시대적으로 살아야 했다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군사독재 정부를 찬양하는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약간의 이해는 해볼 수 있겠으나,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과 더불어 한국문화와 정신을 없애려 했던 일제의 횡포를 찬양하는 것은 이해가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이들은 당시 그때가 그리울지도 모른다. 을사오적의 후예가 역사학자가 되어 역사박물관장을 하는 이 시대에 매국노가 애국자 내지 근대사의 선구자란 말을 듣는 세상이니 그때의 찬란한 권력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들의 눈을 속이고, 국가를 좀먹은 부류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는 이야기 중에서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사회를 위해”라는 슬로건에 왜 아직까지도 이런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아니 그런 의문을 품은 후에 친일파의 꼬리표가 무척이나 확실해서 그것을 밝히려 하면 왜 이상한 인간으로 몰릴까 싶다. 외국에서는 민족주의자는 분명히 보수우파에 파시즘에 가까운데, 우리는 오히려 우파적이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가운데 민주주의는 과연 민주주의로 가는지 아니라면 만주주의로 가는지 한번은 의심가기도 한다. 한국 권력이 집중되고, 개방되지 않은 곳에서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이란 괴뢰국과 더불어 만주국에서 나온 만주군이란 유령이 계속 오고가고 있다.

 

만주주의는 해방을 맞이해도 떠나지 않고, 625 이후 더욱 강해진 것도 모자라 더욱 더 치밀하게 되어가고 있다. 어느 시인의 감옥소에는 종이와 볼펜이 없었다. 그곳의 감시자는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의 일본 순사가 감시할 때는 볼펜과 종이가 있었다. 이른바 동족이란 것이 더욱 강렬히 분노로서 다가오는 것일까? 보통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 싸우면 더 골이 깊은 원수가 된다고 한다. 아니라면 자신의 형이 사회주의자로 몰려 그것을 회피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어느 대통령의 몸부림처럼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당하게 해야 한다는 생존의식인가?

 

이런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던 시절에 한국사회는 아직도 골이 깊숙이 들어 가있다. 이 책의 한 장의 주인공인 신영복 교수의 어린 시절에 나온 이야기처럼 어느 마을의 청년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목을 잘라 귀에 철사를 꽂고 수많은 머리를 연결하여 다리나 마을 어귀에 장식하던 광기의 축제가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뭐든지 깊게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들만의 한 가지의 색으로서 구분지어 그 선을 넘어가는 존재에 대해서는 정의의 철퇴라는 광기가 이성이란 합법으로 변모된다.

 

문제는 그 광기는 아직도 계속 이어져 간다.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나는 억압과 은폐들은 이제 당연시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 군대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고, 회사생활하며 받아야 하는 각종 스트레스, 가정에서 일어나는 불화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단순히 우연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를 배운다. 과거를 배우는 것은 잘한 것과 못한 것 모두 배운다. 그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앎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이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역사는 단지 “있었다.” 에서 그것이 왜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해야 한다. 그 의문이 현재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 문제 자체에 대한 답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은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어도 앞으로 일어나는 미래를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이 정말 시간적인 존재라면 그 과거의 존재에 대한 부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철학적인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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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일기 -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노무현 외 지음, 김경수 엮음, 노무현재단 기획 / 부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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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니며 일하면서 퇴근 후와 주말에 시간을 쪼개어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었다. 그때 읽은 자본에 마르크스는 농촌에서의 농민의 문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박석무 다산학술이사장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읽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농민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오늘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를 읽었다. 유독 이 책을 읽으면서 위에 읽은 책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유럽이든 한국이든 서구사회 기술발전과 문명의 전환은 도시화로 인해 거대한 도시지역을 만들었다. 도시라는 것은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기존에 있던 도시규모에 걸맞은 사업이 생기고, 많은 노동력과 자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동력은 언제나 도시 안에서 창출하기보다는 항상 농촌, 어촌, 산지와 같은 외부인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항상 농촌은 사람들이 줄어만 가고, 도시화로 인해 식량문제를 위해 농촌은 농촌대로 속박을 당한다. 특히 서구사회의 근대역사에서는 농촌지역의 소지주들의 몰락과 대규모 농장으로 통한 농노들의 확대는 더욱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과대한 노동과 적은 대가 그리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그들, 언제나 농촌은 사회적 약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모든 농촌이 그런 것은 아니나, 농촌이 가진 문제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최소한의 식량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자연환경 보존이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촌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도시민들에 비해 소외받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인구밀도, 주변 인프라, 경제적 여유,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그런 소외된 공간에 노무현은 다시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퇴임한 2008년 2월 25일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말이다. 모든 대통령은 정부기관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서울 수도권에 머물기 바랐는데, 그는 고향 김해에 있는 봉하마을로 내려왔다. 게다가 사저는 담도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도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내려온 것이 분명하나 그의 거동은 이임한 대통령이 아니라 그저 고향에 농촌에 시골에 돌아가는 보통 시민으로 돌아갔다.

 

그가 만들고 싶은 고향 봉하마을이란 그동안 한국사회가 도시화와 공업화로 되면서 소외된 농촌을 일으켜 세울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의 정화와 그 정화된 자연환경 공간에서 인간이 마음껏 그 향기를 맡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오면서 바로 동네주변 하천과 산, 거리를 청소를 권장했고, 자신이 직접 앞에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그는 권위적인 명령을 가진 자보다는 다 같이 함께 걸어가기 바란 것이다.

 

그 속에서 시골마을을 위해 오리농법도 하고, 뒷산에 볼품없는 감나무를 베어 장군차도 심고, 동네주민과 같이 웃으면서 살아갔다. 그의 모습은 양복과 넥타이를 맨 정치인 모습보다는 차라리 밀짚모자에 장화를 심은 옆집 아저씨와 옆집 할아버지 모습에 더욱 가까웠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은 대통령 이전과 대통령 시절보다 이때가 가장 최고였던 것이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담겨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아니 때로는 더위와 피로에 지친 모습도 역력한 모습도 나온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또 그리고 자신을 보기 위해 멀리서 운전 7~8시간을 해서라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는 열심히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는 내 마음 속의 대통령이란 말과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멀리 경계하듯이 봐야할 존재가 아니라 가까이 아무런 벽도 없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처럼 대하기 바랐다.

 

그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있었다. 좋은 학벌과 좋은 능력이 있어서 얼마든지 좋은 일자리와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데도, 샤프한 현대 도시인보다는 구수한 농민으로 노무현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옆에서 바라본 김경수 비서관은 말 그대로 대통령 노무현을 보던 것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을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대통령으로 남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아주 흐뭇하다. 애틋하고 인간적이고 마치 아주 보고 싶은 영화 한편을 다시 바라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의 회고록에서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 것 같았다. “담배 하나 주게”라는 그 말에서 내 가슴은 너무나도 쓰라려 왔다.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말이 담배를 달라는 것에서 그 말이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 책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철칙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해 누구는 긍정적 혹은 다른 누구는 부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던 노무현은 정말 자신이 아닌 남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예전에 신문기사를 본적 있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강타할 때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공연을 관람 중에 태풍이 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알고 사과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문기사에 많은 질타가 쏟아졌으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2003년 12월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그 다음해 2004년 자대에 배치되고, 2005년 공사와 설계시공 등을 관리하는 부서로 배치 받았다. 그때 내 초임 업무는 공사와 설계, 대관협의 문서행정이었고, 또 하나의 업무는 하자보수였다. 건축물을 신축 시공하거나 혹은 노후시설물에 대해 대규모 보수를 하면 거기에 대한 하자가 생길 시에 재보수에 대한 업무를 관리·감독한 일이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 매미공사 시에 재해 복구예산이 없었는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판공비를 내어 모두 재해복구비용에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내가 있을 시절에 병영생활관을 개선하기 위해 신축하거나 영내·외에서 거주하는 장교 및 부사관을 위해 관사나 숙소가 한참 이루고 있을 시기였다. 당시 이 업무 때문에 야근과 잔업, 외근만 뛰어다닌 나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군인시절의 나와 내 주변의 군장병을 위한 그의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전역 후에 알았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죽음과 그가 펼친 진정한 가치관을 알았을 때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함을 크게 슬퍼했다. 그래서 차라리 “진보의 미래”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와 같이 정치, 사회, 경제, 외교 등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인 가치를 넣은 도서를 읽으면 마음이 아프지 않으나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라는 책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그를 부정하고, 위선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위선이라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말만 하지 말고, 그것으로 “실천으로 행함으로서 진정한 선과 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냐?”고 말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한 없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고, 한 없이 그립게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그의 정치는 100% 잘했다고 할 수 없다. 모든 정치업무를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말한 집단이기주의 내지 기회주의는 대통령이 타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 주체인 시민이 해결하여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치적 이상과 이념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가치관이다. 정말 잘 살아가는 것은 나만 잘 살기보다는 남과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미사어구는 정말 쉽다. 언제나 선거날이 다가오면 모든 정치인들이 내걸은 하나의 슬로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명제와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뭐든지 결과만 좋고, 그 과정은 어떻게 되든지 관심 없는 수단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단으로 보지 말고, 인간은 하나의 목적으로 보고, 그 인간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치를 인정해야만 좋은 세상이 되어갈 수 있다.

 

그런 세상을 꿈꾸던 노무현은 꿈을 꿀 수 없이 영원한 자연의 세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꿈은 그에게 머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대통령을 가진 사람에게 다시 그 꿈을 꾸게 하였다. 물론 꿈은 좋은 꿈도 있지만, 무서운 악몽도 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게 해준 정치인 노무현보다는 그저 인간 노무현은 여전히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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