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운명 (반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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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변호사, 그는 아마 비명(悲鳴)에 죽어간 故 노무현 대통령의 영원한 남자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있으면 언제나 뒤에서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그 문재인 변호사였다.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그의 영원한 동행자였던 문재인 변호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내었다.


자서전을 보면 대략 자신의 태어나 이때까지 살아온 흔적들을 적어가는 책이다. 그런 자서전의 형국을 본다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들은 많았던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직접 자서전을 저술하기 보다는 이제는 타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자서전이 많은 것 같다. 문재인 변호사의 자서전은 어떻게 본다면 문재인 변호사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故 노무현 대통령과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바뀌어야 할 점과 고쳐가야 할 점, 그리고 같이 생각해야 할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문재의 자서전을 들어다 보면서 느꼈다. 고문으로 죽은 대학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그들, 그냥 약자라는 이유로 내몰린 그들 물론 이 중에서 분명히 어떤 문제가 되는 인자가 있어서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사회가 “냄비 안의 개구리”라고 말이다. 개구리를 잡아 냄비에 넣고 천천히 가열하면 아주 독특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개구리는 양서류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인 포유류처럼 온혈동물이 아니다. 그래서 냄비에 물을 가득 붙고 천천히 열을 올리면 개구리는 그 따뜻하게 데워지는 물속에서 졸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은 수증기가 될 때까지 상승하게 되면 어느덧 개구리는 졸게 된 상태에서 열로 인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개구리도 단백질로 구성된 존재이니 단백질이 열에 의해 익히게 되어 그야말로 살아있는 채로 닭백숙처럼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인 듯하다. “그래 내가 아니니깐, 그래 내가 아닌 남이니 내가 왜 관심을 가지나? 남이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지” 이런 냉소적인 반응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회는 조금 삭막해지고 왜곡된 현상들이 여기저기 쑤셔 나온다. 사회라는 것은 일종의 수평거울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균형이 깨지게 된다면 어느 한쪽에서 추가 기울이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문제가 돌출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운명”에서는 그런 현상들에 대해 어떻게 문재인 변호사가 헤쳐 나왔는지, 그런 과정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과 어떻게 조우했는지 그리고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온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인데, 정말 국가와 정치 그리고 그것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자질이 중요하다 느꼈다. 혹은 권력과 관계된 이른바 돈의 문제는 그룹 NEXT의 어느 노래 가사 구절처럼 “사람위에 있고 종교보다 강하다”, “강한 자에겐 편하고, 약한 자는 밟는다”처럼 우리 사회는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이 너무 강하다.


물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노력과 능력에 대한 분배차이는 인정하나 그것이 하나의 착취와 부당한 형태로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란 점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로 활동할 때의 이야기와 그가 인권(人權)변호사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뭔가 아이러니한 글귀를 읽었다. 왜냐하면 모든 법조인들은 인권을 위해 활동해야 하는데, 인권변호사가 따로 분리되어 호칭이 생겼다는 점에서 과연 법이라는 것이 인권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국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국민을 위해서” 또는 대다수의 약자를 두고 “서민을 위해서”라고 사실 사회적으로 보자면 국민 대부분이 그렇게 가진 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진 자들에게 부당하게 그들이 가진 것을 가져오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최소한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포용해주자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길거리나 혹은 각종 경험에서 나보다 못하거나(그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삶의 무게가 만들었다) 약한 자들을 보면 은근히 우쭐되고 싶은 기분이 말이다. 물론 아무런 노력과 대가 그리고 생각도 없이 자기가 옳다거나 맞다고 하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오만하고 거만하고 위선적인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나보다 약자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할망정 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비웃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이다. 당장 내가 어떻게 도와주거나 처우를 개선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하야 한다는 인식만은 고수하는 사항이다. 그런 인식이 조금 조금씩 나만 아닌 다른 사람들도 쌓이면 사회적인 인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르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변호사는 상당한 활동가였다. 직접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런 일들을 해온 것이다. 본인의 직업이 변호사인 만큼 충분히 변호사로서 경제적, 사회적인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는 가난한 노동자 편에서 그들의 애환을 보았다.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세상은 강자의 논리로 돌아가”라고 물론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힘의 논리가 없다면 세상에 왜 분쟁이 멈추지 않고 터지겠는가? 하지만 그 힘의 논리에 자기 자신도 눌린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은 세상 모든 비극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구경일 것이다.


문재인 변호사가 강연할 때에 뒤에 적힌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 그 옆에 새겨진 글귀가 매우 인상 깊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입니다” 과연 민주주의는 국민 내지 시민이 주인이다. 그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척도이다.


지금과는 다르나 과거 그리스 시민정치에서는 그리스 시민 자신들이 국가의 중심으로 되어 민주주의 시초가 되었다. 대신 여성, 어린이, 노예, 이방인들과 같은 약자를 배제했으나, 적어도 플라톤이 저술한 국가정체(正體)에서는 그 주체자의 도덕성, 강인함 의지, 골고루 배양된 육체 등으로 통해 진정한 정치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단지 시대적인 차이가 있으나 진정한 국가와 정치는 결국 국민과 시민을 위한 것이고, 그 국가와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 역시 국민과 시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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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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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세기 세계인류의 최고의 학자이자 위대한 인간 중의 하나다. 그는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라(構造主義, Structuralism)라는 새로운 철학·사상·학문 분야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구조주의 이전 탄생 이전에 배경이 되었던 학문으로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의 ‘일반언어학’이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조주의가 정확하게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단지 내가 구조주의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변 문학비평을 전공하는 학도들이 나의 학문이나 사상적인 배경이 구조주의라는 평을 많이 듣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철학이나 사상에 깊은 통찰력과 이해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정규적으로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도 아니었고, 예전부터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니다.

 

그저 무지하고 평범한 한국의 보통 인간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알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저런 책을 접하면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철학과 사상 그리고 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접한 분야는 후기구조주의 쪽이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와 근대철학보다는 현대철학부터 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기초 없이 그저 끝부분만 들어다 보니 내 자신이 거기에 얽매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학문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와 근대철학을 같이 읽어보기로 하였다. 중세 서양철학 역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나 너무 기독교(가톨릭)적인 부분이 많으므로 철학적인 부분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부분이 강하여 그렇게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정하면서 이런저런 책을 직접 사서보고 도서관에서 빌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조주의 시작인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보기로 했다. 우선 나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기 전에 먼저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책부터 보았다. 기본적으로 주변 사람들은 나보고 구조주의적이라고 하기도 하나 또한 문화상대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라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만화애니메이션을 리뷰, 비평, 칼럼을 하면서 같이 코스프레라는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심을 기울여서 하나의 리뷰와 비평문화로 이끌어 내기 위해 코스프레 문화에 대한 연구서적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문화인류학자가 바로 마빈 해리스이다. “마빈 해리스”의 “식인과 제왕”, “작은 인간”,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말이다.

 

내가 이런 서적들을 읽으면서 문명과 야생이라는 이원화되어진 공간과 배경 그리고 시간 속에 문명이라는 곳에 살아가는 나 자신과 그리고 우린 인간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편견,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광기적인 사고방식은 인간 자신 스스로가 인간이길 거부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런 서적을 읽으면서 아마 나는 인문학 공부는 문화인류학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학을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할 사람이 바로 “레비 스트로스”라고 들었다. 그리고 예전에 미국 저명한 사회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레비 스트로스“가 누군가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내용은 ”레비 스트로스“가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인 부분도 있는 비판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직접 현장에 방문하여 원주민에 대해 연구하기 보다는 먼발치에 머물러 단순히 외적인 부분에서 연구함에서 그것이 정확한 연구자료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직접 남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여러 원주민을 만나기 위해 열대로 들어가서 원주민과 생활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동고동락한 일들을 적어간 이 '슬픈 열대‘는 “레비 스트로스”가 밀림 지역에 방문하여 거기에 있던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적어 내려간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슬픈 열대“를 읽어보면서 왜 슬플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문명에 살아가는 지금 현대사회에서 1930~1940년대 프랑스는 현 시점보다 문명이 덜 발달함은 사실이다. 그런 상태에서 오늘날 내가 보는 그 미개지역의 원주민들은 그 당시 사람보다 더욱 더 미개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하나의 선입관과 편견 그리고 자만과 오만에 빠뜨린다.

 

바로 그런 자만과 오만이 지금의 나나 많은 사람들에게 혹은 “레비 스트로스”가 방문했던 그 시대에 혹은 그 이전시대라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많았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의 고향이면 삶터인 남아메리카 대륙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다른 누구로부터 지배되어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콜럼부스나 마젤란처럼 많은 항해자나 탐험가들이 남아메리카와 많은 미개척지를 발견한 순간 이 곳은 슬픈 열대로 되어 버렸다.

 

많은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하여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밀림을 파괴하고, 광산을 캐어 환경을 오염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은 어느 순간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그 자신의 색깔을 잃어가면서 많은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를 상실하게 되었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바로 이런 원주민들에 대해 인류학자의 시점으로 그들의 생활과 삶 그리고 운명을 아주 객관적으로 지켜보면서 한편으로 나에게 슬픈 마음을 주었다.

 

특히 원주민들을 구호할 것이라고 유럽 선교사들이 파견되어도 선교사들은 자신들만의 사고와 문화에만 치중하여 원주민 고유문화를 무시하였고,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사상만이 최고로 여겨 원주민들을 업신여기거나 혹은 가혹하게 대하기도 하였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남아메리카에 도달한 정복자들은 원주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들의 옷이나 침구를 숲이나 거리에 놓았다. 그런데 이 옷에는 기존 원주민들이 모르던 무서운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대륙에 아직 퍼지지 않은 많은 전염병들이 원주민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 덕분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하고 일부 종족은 멸종위기까지 갔었다. 이런 잔인하고 어리석은 행위는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어느 원주민 보호자들이 갔을 때에 그들은 원주민들은 아주 건강했다고 기록했으나, 그 원주민들은 어느 순간 없어지게 되었다. 그 보호자라고 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온 병원성미생물이 원주민에게 하나의 사신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문명화되었다고 자만하던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원주민을 죽이고 말았으며, 원주민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한 문명인들은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아주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물론 이 도서에서는 식인문화부분을 다루지 않았으나 사실 식인종족들이 자신의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해 죽이는 인간이 아주 많고 그 살해당하는 인간에게 아주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하여 마지막까지 저주심을 잃게 하지 않으나, 한편으로 보자면 전쟁으로 수십만 내지 수백만 인류를 죽이는 문명들은 과연 도덕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문화라는 곳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물질화된 문명으로 인해 우리의 정신은 항상 빈곤하고 뭔가 부족함 마음을 가진 채 텅 빈 가슴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그런 마음의 빈곤이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에 동화되어 자신의 존재를 거기서 극복하고자 하였다. 자연을 극복하고 동화하고 조화로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오로지 파괴로써 정복하려는 문명인과는 크게 다르다.

 

미개인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불쌍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그 미개인 즉 원주민들이 불쌍하게 된 원인은 원주민들이 미개하기 보다는 문명인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는 미개인이 문명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미개인들은 문명인이 가지고 살아가는 정신적인 풍요에서는 우월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자연같이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점점 현대사회에 도달하면서 조금씩 사라진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 그리고 지구를 오염시키는 환경오염과 자연파괴! 이 모든 행위는 우리 인간이 인간 스스로 인간적인 면을 버려 가며 자기만의 욕구와 타인에 대한 정복욕으로 슬프게 물들어 간다. 슬픈 열대는 문명인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오만으로 병들어간 열대 원주민들을 관찰한 책이다. 하지만 정작 슬픈 것은 열대 쪽의 미개인일까? 아니면 그 미개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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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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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녹차동아리에서 하였다. 이름은 지산다우회라고 작은 대학교 안에 있는 작은 찻잔이 있는 작은 동아리이었다. 그곳에서 대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내며, 마지막 대학 청춘을 보낸 곳이다. 그러나 내가 대학교를 졸업 후에 군간부로 복무하던 중에 인원이 없어서 폐부된 것으로 인해 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한 추억이다.

일단 여기까지 나의 대학 추억담을 올려 놓으면서 저 위에 소개할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관계가 있다. 아주 깊고 깊은 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있던 녹차동아리에서 차의 인물로 꼭 등장시킨 역사적인 사람이 있었다. 18C 조선 후기 불교계의 거승이며 현학자인 아암 혜장 스님과 19C 한국 최고의 다인인 초의선사와 그의 친구인 추사 김정희 선생님, 그리고 이 3명의 다인에게 스승으로 존대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하면 한국 정치, 철학, 사상, 문학, 의학 등 많고 많은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한국에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한국 철학사상의 마지막으로 나오고 그 집합되는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물론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훌륭한 분들은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한국 정치사상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가렴주구로 병들어 가는 불쌍한 백성들에 향한 애정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베트남과 같은 다른 나라까지 가지 않았는가? 월남전이 발발할 때 베트콩의 지도자인 호치민은 다른 것을 다루 내버려 두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만은 가지고 다녔다. 물론 월남전은 미국이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공작을 펼쳐 일어난 일이었으나 적어도 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호치민이 어떤 지도자였고 그 지도자가 그토록 중시하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봂 필요가 있다.

그 호치민이 가슴 속에 품은 목민심서, 이 목민심서의 위대함은 그저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목민심서를 만든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영조시절에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얼마든지 권력을 누리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열렬한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와 그의 인생에 대해 고찰한 서적으로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얼마나 자신보다 약한 백성들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 시대의 비틀림에 통곡했는지 얼마나 그 분이 어긋난 권력 앞에서 시련을 당했는지 우리는 절실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가는데, 어느 농민이 관에다가 세금(군포세)을 제때 납부하지 않아 집에 하나뿐인 재산인 소를 강제로 빼앗겼다. 그리고 그 농민은 자신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분노와 자신이 후사를 낳아 이런 부당한 일에 당한 것에 자괴하여 낫으로 자신의 남근을 베어버렸다.

그 농민이 자신의 신체를 날카로운 낫으로 베어 방안에서 시름하고 있을 때 밖에서 남편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낙네는 방에 급히 들어오 보니 자신의 남편이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이 베어버린 남근을 손에 잡고 그 피가 줄줄 흐르는 슬픈 남편의 남근을 잡고 관아에 달려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관아에 가서 호소만 하면 무엇하리, 관아에 퍼져 나가는 젊은 아낙네의 울음 소리는 동네방네를 돌아가나 높은 담으로 쌓인 관아에는 콧털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낙네는 남편의 남근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며 서럽게 울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애절양"이라는 한국 국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의 탄생배경이다.

최근 75만원 용역에 300~400원 식사비를 제공받는 용역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슬픈 기사를 보았다. 물론 내가 보고도 직접 도와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내 자신도 그런 위선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힘겹게 일을 하고 대우조차 받지 못한채 일자리에서 내몰리는 것을 본다면 위에서 보는 애절양과 무엇과 다르랴?

그런데도 세상은 그분들을 딱하게 여기지 못할 망정 그들에게 야유와 멸시를 보내는 이마져 있으니 참으로 슬프고도 원통하고도 분노가 넘치는 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 그는 분명히 한 시대를 풍미하고 그 심한 박해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굴하지 않은 불멸의 인간이다. 하지만 그분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정신은 여전히 되찾지 못한채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니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나온 어느 시조를 인용하여 각박한 세상이 단군시대보다 못한 것 같으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다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원한 세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저 조금 조금씩 바꾸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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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간 -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김찬호 옮김 / 민음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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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마빈 해리스 교수의 식인과 제왕이란 서적을 읽은 본후에 이번에는 작은 인간을 읽어보았다. 작은 인간이란 단어에서 이 책을 읽은 본인으로서는 작은 인간은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간이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라고 생각했다.
작다는 의미는 키가 크고작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안나가고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가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인류의 문명으로 꽃피운 과학기술의 터전이다.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 이런 사고로 통해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평한다는 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를 알려준다.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원시민족이나 부족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들의 생활구조를 자세히 들어다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훨씬 민주적이고 평화적이고 지혜롭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점을 고려하기 보다는 우리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마빈 해리스 교수의 논저에 충실하게 따르게 되면 상대주의적 인류학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주의를 인정함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기도 한다. 대신 일정한 틀에 맞추어 평가하는 부분이 상당히 미약하기 때문에 주변 분들은 나에게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을 연구해보라고 한다.
물론 레비 스트로스나 마빈 해리스 두 사람 모두 문화인류학자로 명성이 높고 학식과 조예가 깊은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인격에 대해 존중받을 권리와 존중해 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인간 그건 언제나 자신들만의 사고의 틀에 갇혀 인종차별, 종족차별, 남녀차별 등과 같은 일으키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라고 말해주는 단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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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과 제왕 - 문화인류학 3부작 넥스트 3
마빈 해리스 / 한길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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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해리스는 몇년 전에 작고하신 저명한 교수님이다. 필자가 마빈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를 알게된 계기는 코스프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코스프레가 왜 식인과 제왕이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거나 만들기 이전에도 인간은 자신들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
고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란 단순히 여흥을 가지면서 이야기하던 내용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우수한 과학기술과 문명을 통해 많은 혜택을 받고 살고 있지만, 당시 인간들은 질병, 재해, 기아, 맹수들의 공격으로 항상 생명에 대한 위험을 받고 있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거나 혹은 부족한 면이 없으면 인간은 인간 내부 심리적으로 뭔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고대 인류의 주술행위나 코스프레에 대해 근본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든다. 

인간은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항상 뭔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특히 제목 첫부분에 식인이란 말처럼 인간을 먹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하고 잔인한 행위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 자체도 하나의 문화로서 그들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다.
부족한 단백질을 인간의 고기로부터 얻고, 자신들의 국가가 아닌 다른 부족이나 국가에 대한 침입과 공격에 대비하거나 혹은 그 다른 국가와 부족에 대해 위협함으로서 자신들의 부족을 지킬 수가 있다. 

또한 국가가 형성되면 국가체계에 있어서 신분이 결정되어진다. 신분은 통치하는 사람으로부터 통치받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요소로 나누어진다. 제왕은 이런 국가체계에 있어서 부족들을 이끌어갈 존재다. 그들은 단순히 부족사회 구조에서 군림하기보단, 그 군림을 하기 위해 막대한 재력과 정신적 에너지를 투입한다. 왕국은 부족장이 통치하지만 그 통치자는 부족들을 이끌기 위해선 부족원들을 어루만져야 했다.

이런 다양한 고대부족과 원시부족에 대한 이야기, 현대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서구인들이 바라보는 원시부족에 대한 편견을 이책에선 올바른 관점에서 해석하여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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