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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ㅣ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평점 :
대부분의 한국역사를 보자고 한다면 분명 고조선 단군시대부터 시작하려 할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문명 이전의 미개사회인 구석기 내지 신석기가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시작점인 단군시대인가? 아니면 신화도 없는 미개사회인가이다. 문명화된 사회에는 신화라는 미개적인 이야기가 사라질 것이라 보이나, 오히려 신화는 문명화되면 될수록 가속화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다양함과 시대의 복잡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한 욕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국역사를 고조선 시대가 아닌 최근 몇 년 내지 몇 십 년으로 잡으면 어떨까나? 참으로 역사공부를 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계를 돌려서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제일 최근의 일들을 기억하는 존재이지 몇 십 년 전이나 혹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나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들을 찾는 것은 오직 죽은 인간들이 남긴 자료에 의해 분석한다.
그래서인가? 역사라는 학문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다. 그것도 아니 만약조차도 나갈 수 없는 것이 역사다. 하지만 최근에 대체역사라는 드라마 내지 소설, 영화까지 존재하므로 인간의 욕망은 역사조차도 바꾸고 싶어 한다. 단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나 그 자체에서 발생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신화로 남을 것이다. 역사와 신화는 다른 존재이나 신화 속에서도 역사가 보이고, 역사 속에서도 신화가 보인다.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기원은 서기 전 2,333년이고, 그곳의 군주는 단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화 속의 인물인데도 우리에겐 역사의 시초다. 그러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인가? 신화 속의 인물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나 혹은 신화라는 것은 몇 년이 지나도 계속 돌고 돌아가는 하나의 공전과 같은 공식이다.
인간은 천동설적 존재가 아니라 지동설적인 존재이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역사라는 것을 찾아가면 그 이전을 찾아가고,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 잡으면 다시 그 이전과 이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금 우리나라 모습에서 조선 후기와 관계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당연한 논리다. 왜냐하면 조선 최초 불평등 조약 강화도조약이 일어난 배경은 천주교탄압과 서구배척, 일본의 대륙진출이란 야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이런 모든 인자들 속에서 이루어져 흘러갈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학자 내지 고고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역사란 인간이 적어갈 흔적이다. 단지 그 흔적은 아쉬운 기분이 들지만 정치적인 상황의 정리본이란 점이다. 우리 역사책에 어느 동네 할아버지가 가다가 수박밭을 보고 수박이 너무 탐스러워 수박 하나를 잘라 먹는 일들은 역사에 올라가지 않는다.
역사에서 주로 크고 굵직하고 인간사회에 큰 영향 내지 전환을 일으킨 일들이 대부분 실린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 이상의 사회 내지 국가단위의 큰 정치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현 시점에 설아 가는 인간에게 정치적인 해석을 키워줄 수 있다. 혹은 정치사상 도서를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그리스 철학자, 그리고 그들이 살아간 폴리스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역사는 특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영향력이 지금도 현대사회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일반 소시민들이 역사의 주인공에서 소외될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에서 소외되기 보다는 우리가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적어가는 주체로는 성장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는 지금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일 최근의 역사를 적어놓았기 때이다. 그것도 중간이 아니라 머리 처음부터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잘못된 역사 관념과 독단에 빠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권력의 주체는 국가와 사회이다. 사회의 많은 조직인 학교, 직장, 군대, 공장, 법률 등 다양한 제도와 사회적인 여파로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움직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는 필수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고에 머물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한홍구 교수는 이 책을 적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유일하게 분단국가이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과 만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백화점에 가서 상품을 사고, 성적인 욕망을 채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소비욕구와 더불어 인간의 억압에는 성적 억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본주의국가이면서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자기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위에서 말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정말 제대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어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칸트가 인간의 이성에 대해 깊이 통찰한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자기의 절대적인 진리 즉 Dogmatism이란 교조주의에 매달려 있다. 오히려 이런 교조주의적인 요소가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근현대역사의 필수본이다.
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김근태 고문후유증, 부천 성고문이 일어나고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는가? 결국 인간의 폭력과 상스러움을 그대로 미화시키는 파시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끊이지 않은 지난날의 악몽과 영광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영광이나 그들에겐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억압된 대중일수록 권세가들에겐 부와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과정을 낱낱이 파고들어가려 한다.
다소 내용은 진보적이기도 하나, 때로는 진보의 뒤통수를 날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른바 민족주의적인 한국사회의 일면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독립군 노선의 정신이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친일파들이 군부독재 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증하기 위한 묘안이었고, 최근에는 국민단결과 화합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런 사고에 젖는 것에 대해 당시 본인들은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들은 옳은 일이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런 점들이 지금 우리에게 난항을 주고 있다. 특히나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많은 과오도 있지만, 그에 비해 우리 역시 베트남 사람에 저지른 범죄는 감추고 있다. 물론 그런 짓을 하게 한 존재는 극우주의자들의 방법이나 이제는 범죄를 저지른 공모자는 뒤로 빠지고 허울 좋은 명분이 남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마치 잘못은 정치가들이 하는데 그 분노의 시위를 죄 없는 의경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광기는 결국 하나의 종교적인 주술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막대하다. 그 에너지의 분출구에서는 항상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나 희생자란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을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짓눌러야 하나의 정치적인 헤게모니라는 정당성을 발휘한다. 특히 그것이 대규모적이고 폭력적이고 과격해질수록 더욱 가속화된다.
이 책에서는 과거 일본군들이 독립군에게 저지른 일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가?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가 이제는 좌우이데올로기까지 전환되어 결국 중요한 원점을 놓친 채 그저 조종석이 없는 배 한척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표류하는 배일수록 광기와 집착을 강대하고, 거기에 메이는 인간들은 더욱 날뛰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많은 학살과 억압, 탄압들 그리고 그것을 뒤로 하여 몰래 이익을 챙기던 엘리트들, 적으로 봐야할 존재가 알고 보니 독립군이고, 국가적인 인물이 알고 보니 최악의 존재였다. 물론 그것은 누구의 눈인가? 누구의 입장에 따라 다르다. 단지 아쉬운 점은 당시 희생당하고 사라진 존재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유령이 되어 버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승자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에서 그토록 조선민중을 수탈한 중국장수가 당시 조선정부에는 최고의 영웅이었다. 밟히고 밟힌 조선민중은 결국 약자이었고, 게다가 글도 읽지도 보지도 못하니 영락없이 강자의 승리다.
권력의 구조에서 지식은 하나의 도구였고, 언어의 힘으로 권력을 명하기 때문에 지식의 존재 근원에서 언어와 문자는 결국 지배세력이 피지배세력을 잡는 것에 필요한 존재였다. 피비지배자 민중들은 문자와 언어의 이해가 없기에 사고와 사유의 힘은 무척이나 작았다. 단순한 이데올로기 하나만이 절대적 진리다. 지금도 운운되는 매카시즘은 625전쟁이 종결 된지 60년이 되어가는 이 마당에도 꽃피운다.
어느 특정세력 내지 의견에 조율하지 않으면 마녀사냥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만큼 지식에 대한 부재와 그 부재 속에서 맞은 해방, 그 후 반자발적인 정부조직이란 어두운 기억만이 우리의 그늘에서 살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나간 일들을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지만, 이런 식의 일들은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지나간 것을 붙잡고 물어지는 것보다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준비성이다.
이전에 왜 이런 일이 생기고, 누가 관여하였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당시 일이 끝나도 그것에 의해 피해보는 사람들은 계속 고통에 사무치고, 그 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솔직히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일이 가끔 터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은 당시 침묵하고 외면하던 이들이 막상 일이 생기면 크게 분노한다.
분노하는 것은 좋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을 고치면 좋다. 단지 아쉬운 일들은 그것을 넘어서고 나서의 후다. 이 책에선 임금의 목을 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라 한다. 인류학자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서적을 보면 아버지와 같은 군왕, 부족장을 신으로 여긴다. 신은 자연과 같은 존재로 반드시 신은 늙으면 죽고 다시 태어난다. 이때 이 신의 부활을 위해 기존 부족장이나 왕의 목을 누가 친다. 그 치는 사람은 그 왕과 대결로 통해 승리로 통하여 모든 것을 바꾼다.
하지만 한국은 그 그늘 속에 있는 왕의 목을 치지 못했다. 치기도 전에 해방과 북한의 남침이 발생한 것이다. 지나간 일들을 청산하지 못한 것은 왕의 목을 치지 못한 황금가지 소유희망자이다. 앞으로 가지게 될 미래와 권리에서 과거를 빼지 못함은 결국 계속되는 왜곡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史에서는 이런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몰랐던 사실이나 알았던 사실이나, 그것을 제대로 판단했는지 혹은 판단하지 못했는지, 그래도 이 책 전부가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일어난 일 자체만은 사실이었고, 거기에 대한 비극은 현실이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되어 우리가 보기엔 부당하고 어긋나 있어도 당시 사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잘못된 일들을 묻어가는 것이 모든 해결방안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판단해야만 역사라는 거대한 정치적 상황들이 정리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