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2 - 아리랑 김산에서 월남 김상사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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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 그 2번째 이야기를 오늘 보았다. 1권과 같이 역시 이 책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단순히 현상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모습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시금 찾아 가는 것이었다. 단지 이 책에서는 관점을 이렇게 본 듯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역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 시절에 살았던 시절의 인간의 시선이라고 말이다. 즉 우리가 지금 일어난 일들이나 사고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입장과 상황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 적어가면서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나, 실제로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오류와 진실감추기를 배면으로 들어낸 것이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제일 많이 생각난 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보이는 현상들이 왜 그래 되었는가에서 가장 큰 공감을 느꼈다. 한국사회는 뭔가 억압으로 가득하고 뭔가 불합리한 것이 오히려 합리화되어 있으며, 게다가 맞는지 안 맞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해당되는가? 아니면 해당되지 않은가이다.

 

그런 점으로 출발노선이 계보학적으로 다룬 도서만큼 비판의 끝자리는 우리가 보는 이가 아니라 우리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 일본강점기에 대한 피해의식은 막대하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으로 하여금 한일관계가 삭막해지거나 또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대회에서는 총을 들지 않은 전쟁이란 하나의 파시즘적인 형태로 변모된다. 그런데 그 파시즘인 요소에서 원인제공자는 일본이나 한편으로 본다면 우리도 그런 조건들을 다른 나라에게 준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전쟁에 참전한 국군용사들이 처음에는 화려하듯이 출군했으나, 막상 돌아오면 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살하거나 살인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미쳐버리거나, 그 모든 인간의 이성적인 세계에서 멀어진 것을 본다면 잔혹한 전쟁임은 분명하다. 눈앞에서 베트남 사람을 죽이고, 베트남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베트남 여자를 겁탈하고, 이제는 그녀들이 라이따이한이라는 반쪽자리 한국인들을 만들고, 이상한 악순환이 반복된다.

 

역사의 반성이란 가해자에게 필수적이나 그 가해자도 역시 피해자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아이러니하다. 가끔 친일 문제나 베트남전쟁으로 왈가불가하나 문제는 그 어긋난 일들은 모두 같은 한국인들이 저지른 점이다. 혹은 원시적인 신화를 벗어나게 한다는 계몽이라는 새로운 억압의 신화에서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가진 생각을 버리게 하여 자신의 사고를 주입하여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 계몽이라 여긴다.

 

그러나 계몽은 자신의 이성에 대한 한계점에 대한 반성과 자신과 타자에 대한 관념적인 사고로 통해 진정한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순수철학인 형이상학이란 영역에 도달하여 존재와 인식에 대한 진실한 사유로서 계몽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몽이란 단순히 기존의 사고를 다른 사고로 전환할 뿐이지 사고 그 자체를 깨우치게 하는 것은 아닌듯 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일방적인 정보로 통해 창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료와 상황, 실제의 일들은 모두 거짓말같이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하여 새로 만들어진 신화만 메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의 제거기능을 하는 계몽 자체가 억압이란 신화로 발 돋음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오히려 대체된 계몽이란 신화가 군중을 더더욱 우매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는 다카기 마사오라는 인물에 많은 초점을 둔다.

 

긴 칼을 차고 싶은 인물로 니체가 말한 정치란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에 가장 부합한 인물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근대화의 선구자일지 모르나(실제 발전한 것은 있지만), 그 뒤로 보이는 엄청난 폐단들은 모두 감추었다. 세상에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다. 문제는 음지에서 나타난 눈에 가시 같은 현상들을 모두 감추고, 설사 나오더라도 밟더라도 그 문제 자체의 근본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는 곪아가서 결국 곪은 부분이 터지게 된다. 터지는 순간 사회란 큰 혼란을 겪는다.

 

바로 한국 근대사가 그렇다. 이른바 완충지역이 없이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몰고 온 것이다. 생각해보자. 목욕탕에 가서 욕실에 가니 매우 따뜻한 물이었는데, 갑자기 수온이 얼음이 얼을 정도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라면을 넣으면 먹을 수 정도로 뜨거워지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나? 평균 36.5℃의 혈관 온도를 지닌 인간에 몇 도의 차이는 사망으로 이르게 한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터졌을까?

 

기회주의자의 한국 선진화 뒤에는 무궁무진한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은 누구에겐 평생의 눈물이겠으나 누구에게는 평생의 훈장이다. 각 3군 참모총장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계급장에 스타도 아무 계급장도 없이 훈장을 달고 군복을 입으며 거리를 누빈다. 한편으로 보면 구시대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이란 존재 즉 살아있다는 존재론적 가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징화함에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갈등은 피해갈 수 없으나, 어떻게 본다면 암울한 과거에 대한 우리의 씻지 못한 아픔은 분명하다. 역사의 아픔은 쉽게 풀어갈 수 없다. 조선시대에도 역적이나 사문난적으로 몰린 선비들이 묘비도 적지 못하다가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다시 공직에 복귀되고 묘비마저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우리도 그런 역사적인 아픔을 달래기에는 너무 상처가 깊다.

 

현재까지 검찰, 경찰, 교육, 군대, 남자들의 사회에서 많은 일제잔재가 숨 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우리 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머리를 매우 짧게 자르고, 강제적인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녔다. 게다가 선생들의 폭력과 폭언이 엄청났는데, 당시 그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당위성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당위성으로 인지되는 폭력의 미학들이 사실 옳은 것이 아님은 다시 인지되나, 그것에 대한 대처 역시 문제가 된다. 사회적인 구조에서 왜 그리도 되었을까?

 

이 책에서는 그런 점들을 설명하는 것에서 참 좋은 도서이다. 일제의 잔재, 625전쟁에 대한 슬픔들,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언제나 단골메뉴인 군문제에서 말이다. 솔직히 예비군 이야기에서 많은 동감을 자아낸다. 예비군훈련으로 업무에 차질이 생기고, 때로는 모든 일정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가끔 예비군이 필요한가라는 의문 속에서 분단된 조국과 국제사회의 외교와 군사상황을 보면 조금 답답하다. 그런다고 군대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이고, 그런다고 군대를 찬양할 수만은 없다.

 

저기 월남전에 한국군 장교월급이 다른 나라 사병월급보다 못한 것을 볼 때부터 한국에서 군복무를 한 남자로서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게 해버린 과거의 망령들, 또한 군대가 사회질서 유지라는 파시즘적인 요소에서 하나의 큰 역할을 차지한 점도 그렇다. 인간은 하나의 틀에 박히면 그것에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것이 하나의 권력에 의한 헤게모니적인 현상으로도 보이고 말이다.

 

또한 이 책에서 기억나는 부분은 항일무장이다. 이 책은 지금의 우리 눈보다는 당시의 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보는 내내 도저히 초, 중, 고 과정에서 받은 교육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이 책에서 북한의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 군인으로서 그는 역적의 수괴이다. 그런데 70년 전에는 독립군의 영웅이란 점이다. 이에 반해 한국군의 최고봉은 일본군에 충성했던 자이다.

 

아니 독립군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이는데 도를 깨우친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과 연동한 북한군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자 김구마저도 처단하려고 한 사회이니 오죽했을까? 사실 민족주의도 파시즘적인 요소가 과다하다. 그런 민족주의는 가끔 일본과 중국과의 외교마찰로 통해 국민들을 통합시키게 하나,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기도 편하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얼마나 한국사회가 그런 언론 놀이에 잘 넘어가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다른 인상 깊은 점은 아직 읽어보지 않은 아리랑이란 소설이다. 아리랑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김산이란 열렬한 독립운동가면서도 혁명가의 죽음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마음에 들지 않고, 차라리 영화 아나키스트에 나오는 장동건 씨처럼 싸우기를 바란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제거된다.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 배경 지식이 확실히 필요한 듯하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서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더불어 레닌-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인물로 알고 있다. 이전에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발터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머물 시절인 1920년대 러시아에서 발터 벤야민은 트로츠키의 여동생을 만나서 이야기했다고 적고 있다. 그에 비해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달리 반대 쪽에 있었다.

 

분명 스탈린이 집권했을 때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조선독립군도 희생된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사실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도 아닌데, 스탈린의 집권과 더불어 숙청 당한듯 하다. 예전에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나폴레옹이란 돼지에게 내쫓긴 당해서 동물농장이 자유와 평등의 공간이 아닌 공안정치의 소비에트연방을 풍자했다.

 

그런데 문제는 트로츠키적인 스노볼은 숙청되어도 그의 유령은 되살아있다. 모든 문제와 사건은 스노볼과 연계되고,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은 동물들은 모두 스노볼의 끄나풀로 몰아간다. 김산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소비에트연방과 그 뒤를 받은 김일성은 분명 북한의 불법적인 남침을 했지만, 그가 한편으로 독립군이란 사실도 변화 없다. 당시 웃기던 이야기는 만주국의 탄생과 일본군의 중국과 조선의 이간질로 통한 반일전선을 못하게 공작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좌절하는 한국인들에서 김일성이 펼친 전략은 군사전략보다는 희망이라는 전략을 내세운 점이다.

 

축지법이라든지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들은 분명 그가 엉뚱하게 신화의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통해 친일파에게 심각한 반감을 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설자리를 위해 끝없이 투쟁을 했을 것이다. 친일이 친미로 들어서면서 우연한 625는 찬스를 주었다. 하지만 웃기는 점은 친일과 친미를 한 다카기 마사오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에선 핵을 만들어서 자주국방을 도모하다가 미국 기관의 암살요원에게 죽는다고 하는데, 그의 죽음은 친일과 친미의 웃기 넌센스를 보여준다. 아니라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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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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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라는 책을 읽어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이전에 읽어보았던 인류학 관련 도서였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야생의 사고”럼 거의 현지답사를 통해 적어놓은 책보다는 마빈 해리스처럼 현장을 가본 것과 혹은 가지 않은 곳에 따라서 전반적인 인류의 문화와 생태구조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인간의 생활조건에 맞추어 책의 내용을 전개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보다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인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더 재미있게 본 것 같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인간생활과 자연의 관계에서는 마빈 해리스의 관찰력이 더 좋았다는 뜻이다. 단지 이 책에 다루고 있는 내용 중에서 조금 특이할 만한 부분은 문명사회국가와 원시사회국가에서 기존 문화인류학 도서는 원시사회국가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을 연구하려 했다면 여기서는 오히려 문명사회국가 쪽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저자의 원주민 친구인 얄리의 질문처럼 왜 우리 종족들은 당신들 유럽인들처럼 강력하지 못했는가는 질문처럼 이 책에서는 다양한 관점으로서 적어간 것이다. 사실 인류학 관련 도서라고 하여도 다소 언어학 및 생물학, 진화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까지 참고하여 적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실이나 지형변동, 기상이변, 기술의 발전까지 인류학 도서에서 많이 다룬다.

 

그런데 그 기술과 문명을 가진 인간이 어째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느 나라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수 백 내지 수 천㎞에 떨어진 다른 국가에 갈 수 있는데도, 어느 사람들은 하루 1~2㎞ 반경에서 오고간다. 왜 그렇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문명의 혜택과 자연의 영향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될까?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식량이란 큰 전제가 보인 듯 했다. 특히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관계는 인간에게 공동체로 넘어 제국주의라는 국가정치체계까지 넘어가도록 한다. 여기에 국가정치체계가 발달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일하는 부류가 자신이 일한 잉여물이 획득하여 그것의 비축으로 통한 비노동력자의 발생이다.

 

농업에 대한 기술을 연구하거나 혹은 그 지역의 안전까지 경비하는 부류까지 책임지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체계를 가지려면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거기에 따른 노동력을 위한 대규모 인원, 또한 이 인원을 운용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와 체계가 필요하다. 그럼에 따른 국가정치적인 요소를 가진 사회에서는 계급사회가 일어나고, 계급사회는 다시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이 발생한다.

 

문제는 이런 권력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들이 여기저기 생기게 되면 서로 대립하게 되는 점이다. 그 대립은 단순히 국가끼리의 대립만이 아니었다. 국가조직 내지 거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부족들이 이제는 그렇지 않은 부족과 사회를 공격해야 했다. 특히 인구증가와 더불어 식량의 부족, 게다가 높은 인구밀집을 가진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량과 더불어 터전을 구하기 위해 기존 세계에 머물던 부족과 국가에 침범하기도 했다.

 

그것이 대표적인 것인 남미대륙에 거대한 제국주의적인 영역을 넓힌 유럽국가 이야기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재화와 식량 그리고 그것을 나오게 할 수 있는 토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럽국가에서 방문하는 곳에 사람들이 살지 않으면 모르나, 대부분 모두 살고 있다. 그들과 마찰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필요한 도구로 되었고, 그 전쟁의 방법에서 중요한 수단은 총, 균, 쇠이다.

 

총이야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통해 강력한 무기이고, 균은 인간과 분리할 수 없는 미생물이며, 쇠는 인간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물건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무기의 토대가 되거나 무기 그 자체인 존재들이 문명사회국가에서 문명화되지 않은 국가를 정복하는 전략에 많이 사용한 방법이다. 더구나 일부러 천연두 내지 병원성 미생물이 감염된 물건을 고의로 원주민들에게 주게 하여 원주민 부족을 멸하게 하는 잔인한 방법도 동원했다.

 

세균전에 의한 이야기에서 2차 세계 대전에서 직접적인 공격에 의한 방법보다는 세균감염에 의해 군인들이 더 많이 죽었다는 이 책처럼 인간의 정복에서 세균은 무시하지 못하는 공격방법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지 않은 곳에서 새로 들어오는 미생물에 대한 저항력을 인간은 소유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을 들고 온 존재라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도 미생물에게 봉변을 당한다.

 

무더운 지역의 말라리아모기에 대해서 원주민들은 대처가 가능하나 그 외의 지역 사람들은 대처불가능하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이 미지의 영역을 놓치고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식량이 극빈하고 기상도 암울한 북극과 남극에 손을 미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식량공급이 되는 식물도 많이 없고 동물들도 많이 없다. 그래도 인간은 계속 정복해 간다. 어디라도 인간은 살아갈 준비가 된 문명이란 과학기술적 무기가 있으니 말이다.

 

총균쇠에서 그런 인간의 문명사회적인 부분에서 국가체계와 그것에 따른 정복되어가는 원시부족, 심지어 원시부족 내의 대립과 멸망관계까지 적어나간다. 또한 대륙의 넓이와 길이 운행수단에 따라 기술발전 내지 그 문명의 생존까지 귀결된다. 다른 종족이나 국가와 인접성, 식량이 농업중심의 중앙집권화, 자연적인 요건에 따라 오지세계가 되어 격리된 부족들, 이 모든 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하나의 인자로 작용한다.

 

총균쇠의 발전과 성장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연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나는가? 그리고 거기에 따른 다른 인간들과 대립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고립된 환경과 지나친 마찰에 따라 기술과 정치적 제도까지 상이하게 변모한다. 또한 지구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언어와 문자의 힘으로 문명과 정치,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정복까지 새롭게 진화한다. 총균쇠에서 인간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주변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환경론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게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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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오늘 출근합니다! - 사회로 나간 장애 아이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
황윤의 지음 / 학지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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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다양한 존재적인 형태로서 살아간다. 그런 인간의 존재에서 인간은 완벽함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다. 누구는 태어나면서 좋은 집안과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며 어느 누구는 좋지 못한 집안과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런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인해 서로 간의 벽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면서 모두 다르고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의 탄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한 피선택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알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그를 존재하게 한 그 존재형성자 역시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우연의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거기서 태어나면서 우연이 아닌 귀납적인 법칙은 오로지 부모가 누구이고,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 어디이며,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이 형성되어 있는가이다. 인간이란 결국 환경적인 요인에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여 그런 사회적인 존재에서 모두 피선택한 존재라고 하여 자기 인생을 피선택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겐 이성이란 것에 의하여 판단을 내리기 하며, 또한 감정이란 것이 있어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육체적인 존재는 결국 인간을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이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소유할 수 없는 존재도 있으며, 게다가 자신의 신체마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장애우라는 몸과 마음이 약간 불편한 존재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불편할 뿐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작 그들을 불편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양심과 가치관이 더 불편하게 될 것이다.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라고 주장한 서구철학자 레비나스는 사회의 건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사회적인 약자의 얼굴로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장애인, 고아, 이방인과 같은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위치에 놓인 존재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어하나, 자신의 처한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인 상황에 의해 많은 인권적인 소외에서 힘든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처우와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중에서 장애우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다. 이들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가 다반하다. 선천적인 장애는 결국 자신의 인생과 더불어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보다는 그런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것에서 장애우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면 이들에게 내일이란 아름다운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지만 할 수 있다는 사회참여권을 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노력으로 통한 가치의 생산이다. 인간이 가치를 생산하면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노동할 수 있다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또한 경제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장애인들의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점은 이들의 삶의 질이다.

 

이들 대부분은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사회상으로 인해 평생 그냥 그 자리에서 있어야할 문제점을 남긴다. 만약 이들이 일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경제활동으로 통해 가난함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장애아동이 태어난 곳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보다는 가난한 계층이 더욱 많다. 게다가 소외계층 내지 편부모 또는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처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사회적인 참여권 내지 노동으로 통한 자신의 가치를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평생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누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삶을 포기해야 하거나 혹은 옆에 있는 것이라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피하지 못할 짐이 될 것이다. 또한 국가 예산적으로 이들을 그냥 그대로 지원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부분을 조금이라도 개선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예산절감과 동시에 이들에게 직업을 주어서 사회실직률을 감소하고, 특히 장애인들의 구조적인 결함을 오히려 이점으로 삼아 그것을 활용한다면 사업장에서는 부족한 인재의 충원이 될 것이고, 장애인들에게 삶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일을 하지 마란 법도 없고, 사회생활을 하지 마란 법도 없고, 심지어 사랑을 하여 결혼하지 마란 법도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독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난쟁이에게는 보통사람처럼 대하기보다는 보통사람이 난쟁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일반적인 획일화된 관념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회상과 일반사회적인 부분을 이해하기 보다는 역으로 그들을 이해하여 그들 스스로가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한 방법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그들 스스로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은 많은 금전과 권력보다는 자신에게 합목적성이 일치하는 일을 하여 그것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장애인들이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법은 없다. 그들에게 하나의 기회공간을 열어줌으로 그들 스스로 사회적으로 기쁨을 얻어가는 것이다.

 

장애인이라는 최악의 조건이라도 우리가 최소수혜자로서 그들을 생계와 교육기회를 보장하여 그들에게 사회적인 참여를 위한 직업의 기회를 줄 수 있을 때, 그들은 세상이 자기를 외면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사회로 들어가서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출근합니다에서 출근하는 것은 곧 노동을 하는 것이고, 노동으로 통해 이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자기존재적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통하고 있는 고정관념 내지 차별의식을 조금씩 정리하고 그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대하여 마치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 바른 사회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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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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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역사를 보자고 한다면 분명 고조선 단군시대부터 시작하려 할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문명 이전의 미개사회인 구석기 내지 신석기가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시작점인 단군시대인가? 아니면 신화도 없는 미개사회인가이다. 문명화된 사회에는 신화라는 미개적인 이야기가 사라질 것이라 보이나, 오히려 신화는 문명화되면 될수록 가속화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다양함과 시대의 복잡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한 욕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국역사를 고조선 시대가 아닌 최근 몇 년 내지 몇 십 년으로 잡으면 어떨까나? 참으로 역사공부를 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계를 돌려서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제일 최근의 일들을 기억하는 존재이지 몇 십 년 전이나 혹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나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들을 찾는 것은 오직 죽은 인간들이 남긴 자료에 의해 분석한다.

 

그래서인가? 역사라는 학문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다. 그것도 아니 만약조차도 나갈 수 없는 것이 역사다. 하지만 최근에 대체역사라는 드라마 내지 소설, 영화까지 존재하므로 인간의 욕망은 역사조차도 바꾸고 싶어 한다. 단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나 그 자체에서 발생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신화로 남을 것이다. 역사와 신화는 다른 존재이나 신화 속에서도 역사가 보이고, 역사 속에서도 신화가 보인다.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기원은 서기 전 2,333년이고, 그곳의 군주는 단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화 속의 인물인데도 우리에겐 역사의 시초다. 그러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인가? 신화 속의 인물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나 혹은 신화라는 것은 몇 년이 지나도 계속 돌고 돌아가는 하나의 공전과 같은 공식이다.

 

인간은 천동설적 존재가 아니라 지동설적인 존재이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역사라는 것을 찾아가면 그 이전을 찾아가고,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 잡으면 다시 그 이전과 이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금 우리나라 모습에서 조선 후기와 관계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당연한 논리다. 왜냐하면 조선 최초 불평등 조약 강화도조약이 일어난 배경은 천주교탄압과 서구배척, 일본의 대륙진출이란 야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이런 모든 인자들 속에서 이루어져 흘러갈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학자 내지 고고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역사란 인간이 적어갈 흔적이다. 단지 그 흔적은 아쉬운 기분이 들지만 정치적인 상황의 정리본이란 점이다. 우리 역사책에 어느 동네 할아버지가 가다가 수박밭을 보고 수박이 너무 탐스러워 수박 하나를 잘라 먹는 일들은 역사에 올라가지 않는다.

 

역사에서 주로 크고 굵직하고 인간사회에 큰 영향 내지 전환을 일으킨 일들이 대부분 실린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 이상의 사회 내지 국가단위의 큰 정치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현 시점에 설아 가는 인간에게 정치적인 해석을 키워줄 수 있다. 혹은 정치사상 도서를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그리스 철학자, 그리고 그들이 살아간 폴리스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역사는 특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영향력이 지금도 현대사회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일반 소시민들이 역사의 주인공에서 소외될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에서 소외되기 보다는 우리가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적어가는 주체로는 성장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는 지금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일 최근의 역사를 적어놓았기 때이다. 그것도 중간이 아니라 머리 처음부터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잘못된 역사 관념과 독단에 빠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권력의 주체는 국가와 사회이다. 사회의 많은 조직인 학교, 직장, 군대, 공장, 법률 등 다양한 제도와 사회적인 여파로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움직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는 필수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고에 머물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한홍구 교수는 이 책을 적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유일하게 분단국가이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과 만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백화점에 가서 상품을 사고, 성적인 욕망을 채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소비욕구와 더불어 인간의 억압에는 성적 억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본주의국가이면서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자기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위에서 말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정말 제대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어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칸트가 인간의 이성에 대해 깊이 통찰한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자기의 절대적인 진리 즉 Dogmatism이란 교조주의에 매달려 있다. 오히려 이런 교조주의적인 요소가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근현대역사의 필수본이다.

 

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김근태 고문후유증, 부천 성고문이 일어나고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는가? 결국 인간의 폭력과 상스러움을 그대로 미화시키는 파시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끊이지 않은 지난날의 악몽과 영광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영광이나 그들에겐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억압된 대중일수록 권세가들에겐 부와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과정을 낱낱이 파고들어가려 한다.

 

다소 내용은 진보적이기도 하나, 때로는 진보의 뒤통수를 날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른바 민족주의적인 한국사회의 일면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독립군 노선의 정신이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친일파들이 군부독재 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증하기 위한 묘안이었고, 최근에는 국민단결과 화합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런 사고에 젖는 것에 대해 당시 본인들은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들은 옳은 일이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런 점들이 지금 우리에게 난항을 주고 있다. 특히나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많은 과오도 있지만, 그에 비해 우리 역시 베트남 사람에 저지른 범죄는 감추고 있다. 물론 그런 짓을 하게 한 존재는 극우주의자들의 방법이나 이제는 범죄를 저지른 공모자는 뒤로 빠지고 허울 좋은 명분이 남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마치 잘못은 정치가들이 하는데 그 분노의 시위를 죄 없는 의경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광기는 결국 하나의 종교적인 주술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막대하다. 그 에너지의 분출구에서는 항상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나 희생자란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을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짓눌러야 하나의 정치적인 헤게모니라는 정당성을 발휘한다. 특히 그것이 대규모적이고 폭력적이고 과격해질수록 더욱 가속화된다.

 

이 책에서는 과거 일본군들이 독립군에게 저지른 일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가?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가 이제는 좌우이데올로기까지 전환되어 결국 중요한 원점을 놓친 채 그저 조종석이 없는 배 한척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표류하는 배일수록 광기와 집착을 강대하고, 거기에 메이는 인간들은 더욱 날뛰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많은 학살과 억압, 탄압들 그리고 그것을 뒤로 하여 몰래 이익을 챙기던 엘리트들, 적으로 봐야할 존재가 알고 보니 독립군이고, 국가적인 인물이 알고 보니 최악의 존재였다. 물론 그것은 누구의 눈인가? 누구의 입장에 따라 다르다. 단지 아쉬운 점은 당시 희생당하고 사라진 존재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유령이 되어 버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승자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에서 그토록 조선민중을 수탈한 중국장수가 당시 조선정부에는 최고의 영웅이었다. 밟히고 밟힌 조선민중은 결국 약자이었고, 게다가 글도 읽지도 보지도 못하니 영락없이 강자의 승리다.

 

권력의 구조에서 지식은 하나의 도구였고, 언어의 힘으로 권력을 명하기 때문에 지식의 존재 근원에서 언어와 문자는 결국 지배세력이 피지배세력을 잡는 것에 필요한 존재였다. 피비지배자 민중들은 문자와 언어의 이해가 없기에 사고와 사유의 힘은 무척이나 작았다. 단순한 이데올로기 하나만이 절대적 진리다. 지금도 운운되는 매카시즘은 625전쟁이 종결 된지 60년이 되어가는 이 마당에도 꽃피운다.

 

어느 특정세력 내지 의견에 조율하지 않으면 마녀사냥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만큼 지식에 대한 부재와 그 부재 속에서 맞은 해방, 그 후 반자발적인 정부조직이란 어두운 기억만이 우리의 그늘에서 살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나간 일들을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지만, 이런 식의 일들은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지나간 것을 붙잡고 물어지는 것보다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준비성이다.

 

이전에 왜 이런 일이 생기고, 누가 관여하였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당시 일이 끝나도 그것에 의해 피해보는 사람들은 계속 고통에 사무치고, 그 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솔직히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일이 가끔 터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은 당시 침묵하고 외면하던 이들이 막상 일이 생기면 크게 분노한다.

 

분노하는 것은 좋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을 고치면 좋다. 단지 아쉬운 일들은 그것을 넘어서고 나서의 후다. 이 책에선 임금의 목을 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라 한다. 인류학자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서적을 보면 아버지와 같은 군왕, 부족장을 신으로 여긴다. 신은 자연과 같은 존재로 반드시 신은 늙으면 죽고 다시 태어난다. 이때 이 신의 부활을 위해 기존 부족장이나 왕의 목을 누가 친다. 그 치는 사람은 그 왕과 대결로 통해 승리로 통하여 모든 것을 바꾼다.

 

하지만 한국은 그 그늘 속에 있는 왕의 목을 치지 못했다. 치기도 전에 해방과 북한의 남침이 발생한 것이다. 지나간 일들을 청산하지 못한 것은 왕의 목을 치지 못한 황금가지 소유희망자이다. 앞으로 가지게 될 미래와 권리에서 과거를 빼지 못함은 결국 계속되는 왜곡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史에서는 이런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몰랐던 사실이나 알았던 사실이나, 그것을 제대로 판단했는지 혹은 판단하지 못했는지, 그래도 이 책 전부가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일어난 일 자체만은 사실이었고, 거기에 대한 비극은 현실이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되어 우리가 보기엔 부당하고 어긋나 있어도 당시 사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잘못된 일들을 묻어가는 것이 모든 해결방안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판단해야만 역사라는 거대한 정치적 상황들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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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 컬리지언총서 6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 이종태 옮김 / 이후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사회를 보고 있으면 이른바 탈(脫)정치 내지 탈(脫)이데올로기 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더욱 심각한 정치적인 영향 내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른 선험적 내지 경험적인 혜안을 실은 인문학 도서에서 많이 찾기도 하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더욱 난항한 방법으로 가고 있다.

 

가령 이전에 내가 본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의 대한 권리”를 읽어보자. 흔히 프랑스라고 한다면 자유, 평등, 인권을 중시한 나라에다가 철학과 예술의 파리도시를 꿈꾼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이나 혹은 알제리 내지 외국과 그 나라의 국민 또한 소수민족과 이방인들에게 펼친 파시즘적인 부분은 매우 끔찍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쟁취했다는 그 사실에 의한 탈파시즘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욱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파국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우리는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은 끝났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군도 물러갔고,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독립 세력들은 정치에 대한 권리를 찾아 새로운 나라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막상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걸은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자유를 막는 억압과 사람을 차별화는 불평등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1960년대에 들어오게 되자 사회적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그것은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이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파리에서 일어난 루이왕권의 몰락을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니 1776년 세계 최초 내지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는 미국 역시 자유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통한 억압의 시작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있을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 그리고 사회관계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하나의 관문을 넘어서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고방식이다. 어떻게 보자면 진보와 미래를 추구하는 시작이 이제는 극도의 보수와 폐쇄로 이어졌다.

 

생각해보자? 미국이란 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흑인들이 계속 인종차별로 노역에 시달리고, 밥 먹는 자리나 버스 타는 자리나 심지어 길 걸어가고 있는 보도가 아닌 차도에 걷도록 횡포를 당한다. 이런 나라에서 자유 내지 평등을 외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가치를 묻고 그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게 과연 진정한 자유인가? 평등인가? 이런 문제들은 수시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 발현되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관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지금 읽어본 <신좌파의 상상력>이란 도서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좌파와 그리고 반대되던 우파를 넘어 좌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인간의 근본에 대해 묻고 거기에 응답하고 많은 대학생, 노동자, 여성, 심지어 고등학생과 어린이까지 다양한 계층들이 자신의 인간존재성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주사회 내지 자유사회, 그리고 평등적인 사회 관념을 배우는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는 묻혀진 이야기다. 사실 돌이켜본다면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집권하여 전쟁의 열기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와 독일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기울게 하여 국민들을 위기에 빠지게 하였고, 국민들이 1871년 2월 자발적인 정부를 세우려했는데, 프랑스 권력자들은 타국의 군인들을 내국으로 들여 파리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물론 1848년의 2월 혁명도 역시 많은 피와 희생이 있었으나, 진정한 시민이 주인이고, 진정한 정치참여권에 대한 의지는 여기서 부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쉽지도 않고 머나먼 길처럼 보였다. 사실 유럽의 근대사는 매우 어지러웠다. 많은 전쟁과 음모, 혁명, 개혁, 반정 등등 이 모든 것이 폭풍처럼 휘말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1차와 2차 대전 그 후에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까지 말이다.

 

사실 미소 냉전 시대에는 세계는 2원화적인 정치상황이라고 말하여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2가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배척당한다면, 그 배척을 받아들여 그것을 하나의 가치관으로 올린다면 상당한 전환점이 아닌가 싶다. 사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볼리비아 산악지방에서 가슴에 총알에 박힌 채 죽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 CIA의 명령받은 군조직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이래 생각할 것이다.

 

미국의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체 게바라의 죽음과 투쟁에서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이질감이 있었다. 오히려 소비에트 연방은 체 게바라가 제3세계의 독립과 민주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면 소비에트 연방은 피곤해질 뿐이다. 이미 두 강대국은 서로의 힘겨루기를 은연중에 인정하고, 힘을 나누어 기득세력이 이익을 누릴 하나의 진리 아닌 진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억압된 부분들은 세계 어디에 가도 존재했다.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오,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대한 억압이다. 이것에 분노하여 일어난 것이 프랑스 5월 혁명이다. 그것은 당시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이고, 외국인 차별에 대한 인종평등주의이며, 여성과 노동자 심지어 어린이까지 인권을 중시하는 운동이었다. 정치적인 이념노선을 떠나 인간 그 자체의 생존을 위해 모두 투쟁을 하였다.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과 낭테르 대학에서 모든 대학은 노동자에게 24시간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지식과 권리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 가려는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열정이었다. 비록 혁명은 실패라고 하나 이듬해 드골정부는 실각하게 이르게 된다. 이런 운동은 1970년 미국에서 5월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는 나는 매우 친숙한 이름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은 미국의 언어학자이면서 세계 최고의 지식인(세계지식인지도 1장을 장식한) MIT공대 언어학과 교수 노암 촘스키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통킹만사건 조작(미군 스스로 통킹만 공작을 함에도 베트남이 했다고 하여 베트남을 침공하였으며, 후에 공작이란 사실이 폭로됨)과 동시에 전쟁으로 죄 없는 현지 국가의 인명과 자국의 군인까지 죽는다고 했다.

 

독재국가의 정치인에게 뒤에 몰래 군사자금과 무기를 제공하여 독재를 이어가게 하고, 그 독재자인 샤, 마르코스, 뒤발리에가 자국민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동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들이 벌인 레바논전쟁의 대학살은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영화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 바로 신좌파라는 존재는 기존의 구좌파를 벗어난 존재였으며, 오히려 구좌파와 대립을 하였다.

 

이런 점은 당시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을 주도하던 상황주의자들은 기존 체계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게 전문을 보내 그들마저 부정했다. 그들은 오로지 인간을 억압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거부는 기존의 세계에 가진 낡은 생각을 버리게 했다. 물론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들은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나처럼 타인들도 인권을 가진 존재로 평등해지기를 바란 것은 엄청난 파장이었다.

 

이른바 eros effect라는 삶에 대한 충만한 의지가 여기서 실현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열리는 우드스탁이란 대규모 락공연, 그리고 많은 저항문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아는 불멸의 블루스락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도 그 반문화에서 자유와 생존에 대해 불을 붙인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모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사실 흑인들을 차별하던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

 

춤과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서로 모이고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게 되는 교감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결국 신좌파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도 자유에 대한 열정을 다루고 있었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지금도 저항은 일어나고 있으나, 조금 나는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와 약자에 대한 삶의 의지를 외쳤으나, 그런 사람들을 공격한 사람들이 룸펜 프롤레타리아 내지 그냥 프롤레타리아였다.

 

흑인들이 평등과 자유, 그리고 인권보장을 위해 인종차별 반대시위를 할 때 다른 흑인 노동자들이 와서 공격했다.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래도 억압받던 주체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사실이 당연하게 여기게 되던 헤게모니적인 상황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살아가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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