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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평점 :
인간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자신의 사회의 구성원이란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영역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참 말하기가 쉽고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즉 정치는 자신의 이념이나 관념에 대한 부분을 모든지 쉽게 판단하고 편을 가누어 힘겨루기 하는 방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내 정치여건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인 언변과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나, 문제는 그 정치라는 것에 대한 주변적인 부분이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대한 진행보다는 결과론적인 부분에 집착할 경우 정치는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를 가장한 싸움에 불과하다.
인간은 사실 투쟁을 좋아한다. 그 투쟁의 원인은 많은 원인이 있겠으나 그것은 결국 인간사회의 문명에서부터이다. 인간이 문화라는 공간이 시작하는 시기에 2가지 상황이 있었다. 1가지는 자연으로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 즉 야만인이라고 하는 문명인들의 야만스러운 사고로 지정한 부류가 있고, 뒤에는 인간의 물적 혜택과 국가적인 정치제도에 맞추어가는 방법이다.
본래 인간이 자연으로 살아가던 시절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투쟁은 없다. 어떻게 보면 원시인 내지 혹은 그 이후에 야만민족, 원시민족들에게 정치적인 부분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 하나? 그들은 정치적인 분쟁이 없었지, 정치 그 자체가 없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혜택이 누군가에겐 불리한 부분을 가져갈 수 있다. 정치라는 것은 조율에 가깝고, 불리한 입장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중에 엘렉트라 신화가 있다. 닥치고 정치를 읽다보면 박근혜 대표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분은 이른바 아버지를 국가로 하는 분이고, 게다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람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적용하기가 딱 좋은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엘렉트라라는 인물의 아버지는 아가멤논 왕으로 고대 그리스신화 전쟁인 트로이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가멤논왕은 전쟁을 위해 항해를 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죽여 신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아가멤논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충격과 분노에 휘말려 결국 자신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공모하여 아가멤논 왕을 죽이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엘렉트라를 가난과 추위에 헐벗게 하였다. 그리고 아가멤논의 왕의 복수를 꿈꾸던 엘렉트라는 자기 나라 멀리서 사는 동생 오레스테스와 공모하여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였다.
그 후에 오레스테스는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환청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올리푸스 신 중의 1명인 아테나 주관 아래 재판을 벌여 50:50이라는 공판으로 통해 죄를 사면받았다. 따라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신화처럼 인간의 죄를 가볍게 하고, 인간의 잘못을 인지하게 하여 앞으로 남은 인생을 다시 활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의 정치는 그것이 다르게 되었다. 과거에 비해 너무 사람들도 많아지고, 교류해야할 사회적 구성원 내지 외교적인 영역이 남아있었다.
특히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은 바로 정치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이 바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도이다. 이른바 좌우 이념갈등이란 점에서 깊이 공감을 보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책을 보면 저자 딴지총수가 1980년대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며, 본인이 읽었던 책이야기를 거론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 <공산당선언>, <자본>이란 도서이다.
사실 마르크스 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시초라고 하나, 이미 그 전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이나 개념이 벌써 유럽에 있었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런 이념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이론을 정립하고, 현실을 제대로 보아 사회구조를 분석하여 자본주의를 전도시키기 보다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보자고 한 것이다. 사회구조와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기본 이론과 사상조차도 등장하기가 어려우며, 나온다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정보와 관념으로 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좌파에서 좌파의 근본은 사실 마르크스부터 시작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와 같은 인물로 가는 것은 분명하나, 21세기가 와도 마르크스의 이론은 아직도 통용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좌파라는 존재에 대해 단순히 정치적인 지지도에 따른 좌우 분리로 이어진다. 닥치고 정치에서 딴지총수 김어준씨는 그런 점들을 간파했다. 김어준 총수는 마르크스가 어쩌고,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과 같은 학자나 사상가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재 그대로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정치라는 것에 대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정치를 이해하기에는 많은 부분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언급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미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철학, 미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학문이나 도서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까지 이 책에서 말하지 않는다.
명랑시민 정치교본이란 말처럼 내가 지적하거나 딴지총수가 간파하듯이 시민들이라 사람들중에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의 뒷면인 사상과 철학에 대해 깊이 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붙잡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치란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투표라는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정치적인 의결권을 표명 가능한 것은 오로지 투표이다.
고대 그리스처럼 직접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같이 모든 시민에게 정치적 참여권으로 정치체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물론 고대 그리스는 성인남성만 가능했다. 노예, 어린이, 이방인, 여성 등에게 투표권을 선사하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과 같은 자유국가라는 곳에서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20C 초반이란 점을 생각하면 정치참여권을 국민과 시민에게 제대로 부여함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민주주의 꽃이 선거의 투표권 역시 전체 투표행사권의 반조차도 권리를 제대로 표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감정기와 625전쟁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아픔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오는 가이다.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 전체주의적 사고방식 즉 파시즘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닥치고 정치에서는 한국의 정치를 보수보다는 보수가 아닌 보수가 집권하고 있다고 한다.
맞다. 그 말은 맞다. 이른바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위험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매카시즘은 미국의 상원의원 조지피 매카시라는 인물이 당시 1940~50년대 미국 정치계열에서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과 대치하고 있어서 이른바 자신의 정치세력에 부합하지 않은 인물을 소비에트 연방의 첩자나 동조자로 보고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하던 정치적 테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매카시즘이란 이데올로기가 한국과 일본에 수입되고, 특히 한국에서 빛을 발한다. 한국의 보수는 이른바 매카시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그것을 언급한다. 항상 북한과 문제는 어느 특정 정치세력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매카시즘이란 방법으로 자신들의 적을 제거하고, 국민들에게 폭력의 미학을 상기하는 파시즘으로 몰고 간다. 결국 전체주의적인 영역에 언론과 미디어까지 부합되면 국민들은 이미 자신들의 손에서 놀아난다.
그것에 대항하던 세력이 지난 세월은 민주화 운동 선봉자들이고, 이제는 매카시즘을 이용한 국민통제와 민주화 운동을 군사적 폭력에서 금전적 혹은 언론적인 폭력으로 강행한다. 그런 공간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의 폐단은 독점 기업의 상술을 지나 그룹 총수들의 불법 자금 횡령과 세금 포탈, 그리고 그것을 무마해주는 부패한 관료체계와 언론들을 말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소지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반사회적인 존재로 낙인을 찍으려 하는 사람이나 세력으로 몰고 간다. 그래도 계속 투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김어준 총수는 투쟁의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도 이야기했다.
투쟁을 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투쟁의 공간에서 뭐가 맞고 그른 것인가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김어준 총수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자신은 노제에 갔다가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버스 뒤편에 혼자 눈물을 흘리다가 이런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겠다고 말이다. 그는 봉하마을조차 가지 않으려 한다. 가면 마음이 매우 약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그의 정치적인 맥락은 단순히 과거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나 새로운 면을 보자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서 진보세력이 너무 딱딱하고 자신에게 갇혀있다고 했다. 일단 서구의 사상에 의한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들이 많았다. 우리가 학교수업이나 대학강의실에서 듣는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은 거의 좌파적인 인물로부터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배운다고 해도 그 원리나 체계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가는 것은 좋으나 투표권이 있는 시민과 국민들에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란 도서는 국내에서 총 5권이 넘는 도서로 페이지가 시리지를 합하면 3000페이지가 넘는다. 그 책에서는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읽기에 벅찬 글이다. 그의 글은 오히려 지식을 알고 있는 부르주아 내지 귀족들이 보고 납득할 수 있는 도서였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나 글을 귀족적이란 사실이다. 그래도 현재 노동운동이나 좌파운동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건재하다. 다만 그것이 정말 우리 같은 서민이나 약자에게 좋을망정 어떤 내용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대중정치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어준 총수의 큰 대안점이다. 물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어려운 단어보다는 쉽게 국민과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쉬운 말이 지지도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작년에 큰 히트를 쳤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전 국민인가? 그것을 십만명 이상 읽어도 치더라도 그것을 완독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인가?
정치적인 활동에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이다. 정치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누가 좋네 마네. 이게 좋아 싫어. 하지만 그 뒤에 넘어가면 수많은 담론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알고 가기 전에 기차와 버스는 떠나가는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바로 그런 준비되지 않은 국민과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보기 쉽고 재밌게 가려고 하는 정치서적이다. 정치란 사실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는 오로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찾아오는 온갖 이권과 혜택이다.
그저 멀리 외부서 관람하는 국민과 시민은 구경꾼이다. 즉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 쇼에 불과하고, 우리 국민과 시민들은 그 쇼에 열광하고 환호하는 방관자에 불과하다. 그 쇼는 계속 이어지고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쇼를 계속 관람할 것인가? 아니면 쇼를 바꾸어 볼 것인가? 닥치고 정치는 그런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정치를 새롭게 변화하려고 한다.
물론 그 정치적인 최종목적은 노무현의 신화를 뒤에 찾아오는 문재인 변호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김어준의 목표는 문재인 변호사의 대선에 집중된다. 스펙타클의 전복해도 다시 새로운 스펙타클은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을 소외하는 것인지 그 소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차이는 분명한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