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 2단 접이 특수양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학고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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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보기 싫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내 곁이나 혹은 우리 곁에 또는 다른 사람의 곁이든, 그저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저 건강하게 지내기만 한다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귀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말 좋은가 안 좋은가를 알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라면 19C 독일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한 번 다투어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지 그 사람이 정말 친해질 수 있는지 아니면 친해질 수 없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다른 사람과 계속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 다툴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옆에서 혹은 멀리서 그가 다투는 모습만 봐도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안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는 노무현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노무현은 다양한 이름으로 담겨있다. 정치인, 사상가, 변호사, (좋거나 혹은 나쁜) 대통령 등등이다. 그래도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 노무현은 좋은 사람이다.


실제로 볼 수 없었으나, 그저 TV의 뉴스와 신문, 잡지 속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를 좋아한 이유는 그가 나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인간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못한 가시밭길과 같은 고난이었다.


가난은 물론이오, 갖은 협박과 음모, 그리고 조작들 그 속에서 그의 인생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노무현의 신화는 화려한 이야기보다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그의 신화는 영광과 성공보다는 좌절과 패배의 맛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좌절과 패배 뒤에서는 고통 받고 있는 약자들이 있었다.


그가 비극적인 신화의 주인공이도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자신보다 더 어렵고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배운 게 없어서 백이 없어서 고통 받아본 사람은 그도 마찬가지이나, 그래도 노무현보다 더 가난하고 무식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공장에서 월급도 못 받고, 다쳐도 보상도 못 받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했는데 억지로 잡혀 들어가고, 그것도 부족해서 갖은 폭력과 성희롱, 협박과 공갈 이 모든 것이 노무현이 넘어가야할 신화 속의 고난이고 모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화의 주인공처럼 그들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로 보면서 눈물도 흘러야 했다. 하지만 그런 모욕과 조롱을 받고 일어섬으로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르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모든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가 탄핵당해도 그가 언론에 공격당해도 심지어 영혼이 신체에서 벗어나 한줌의 재로 변해도 말이다.


그의 죽음은 노무현의 이야기가 끝나고 노무현의 신화가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 앞에 있던 피눈물은 다시 신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육체적 존재인 노무현은 1명일 줄은 모르나, 정신적 존재인 노무현은 1명이 아니라 끝없이 태어날 것이다.


그가 원하던 사람 사는 세상, 그것은 배운 것이 없고, 가난하여 생계에 시달리고, 아는 것이 없어서 무시당하고 냉대당하고, 힘이 없어서 부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꿈도 가진 채 희망을 품기를 원한 세상을 만들어갈 새로운 노무현을 말이다. 흔히들 인간이란 영혼을 가졌다는 관념 아래 정신적인 이성세계를 가졌다고 하여도 인간은 역시 마음을 가진 감정적인 동물인 것 같다.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이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떠오려도 그래도 역시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느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어느 사람들은 울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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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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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C 독일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詩人)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시는 너무나도 인상 깊고 잊을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은 “직조공(織造工)의 노래(歌)”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읽어보면 그들의 원망과 분노, 한탄이 하늘 위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오늘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명숙씨가 노동가요 배포와 관련된 일로 구속을 당한 직후 심한 고문과 독방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공안경찰들이 와서 그녀를 잡아가게 만든 노래는 다음과 같다. 시와 노래는 비슷하니 그 음율적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인간의 마음에 와닿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살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일했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쳐서 눈빛에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당시의 노동자의 대우는 매우 혹독했다. 사실 한국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답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위협당할 경우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기 전의 인사청문회의 질문이 정말 코미디와 같았다. 누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은 무슨 국가냐고? 그녀의 대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질문자가 다른 코멘트를 추가한다.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국가 점에서 한국은 경제자유가 보장되어있는 자본주의국가는 맞다. 그리고 개인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는 점에서 자본주의구조사회가 장점도 있다. 문제는 그런 구조사회에서 정말 자유롭게 하는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어느 사람이 정해진 근로시간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안전적인 장치와 보건환경적인 요소에서 소외를 당하면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맞는 처사이냐고 말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지금에 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시 그녀가 살아온 길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권을,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국민들에게 맑은 물과 공기를,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은커녕 오히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그런 삶 인듯 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과부가 되어 13년 넘게 남편을 보지 못한 여인, 법적인 절차도 없이 납치되듯이 경찰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고, 거기에 모자라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말이다.

 

가족 중에 남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불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한 지선에 생각을 치우쳐져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편하게 생각하기 좋기에 남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에서는 눈빛이 변한다.

 

기회주의적인 인간형에 길들어진 사회구조에서 세상은 각박해져 가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는 더욱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밟히고 밟힌 사람과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본인마저 밟힌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한국사회 이면에 가려워진 어둠이 보인다.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원망했냐는 말에 하지 않는다고 하나,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후려친 존재들에 대한 용서한다는 말조차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공감 가는 부분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성부 장관 시절,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전통적인 부분의 혼동이 남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전통 문화는 조선사회를 많이 따라가는데, 특히 성리학 부분에서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폐단적인 부분을 아직까지 수용하는 점이다. 확실히 전통문화의 존재와 현실화는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정체성에서 과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전통이 아닌 것이 당연지사로 넘어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인권문제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학대받아온 여성의 권리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학교 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 인권문제도 문제이나 남성의 억압된 사회도 같이 생각할 부분이었다. 문성근씨와 황신혜씨가 출연한 “생과부 위자료 소송사건”처럼 인간은 항상 억압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취지의 여성부가 지금은 안타까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명숙씨의 이화여대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촌, 어린이, 노약자, 여성이 주된 초점이라면 지금의 여성부는 엘리트주의적인 이화여대 엘리트를 위한 정치권리 노선이 아닌가도 싶었다. 한명숙씨가 추구한 페미니즘이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간애적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무참히도 가슴을 짓밟힌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런 짓밟힌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욱 짓밟힌 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의 의지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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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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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자신의 사회의 구성원이란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영역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참 말하기가 쉽고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즉 정치는 자신의 이념이나 관념에 대한 부분을 모든지 쉽게 판단하고 편을 가누어 힘겨루기 하는 방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내 정치여건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인 언변과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나, 문제는 그 정치라는 것에 대한 주변적인 부분이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대한 진행보다는 결과론적인 부분에 집착할 경우 정치는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를 가장한 싸움에 불과하다.

 

 

인간은 사실 투쟁을 좋아한다. 그 투쟁의 원인은 많은 원인이 있겠으나 그것은 결국 인간사회의 문명에서부터이다. 인간이 문화라는 공간이 시작하는 시기에 2가지 상황이 있었다. 1가지는 자연으로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 즉 야만인이라고 하는 문명인들의 야만스러운 사고로 지정한 부류가 있고, 뒤에는 인간의 물적 혜택과 국가적인 정치제도에 맞추어가는 방법이다.

 

 

본래 인간이 자연으로 살아가던 시절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투쟁은 없다. 어떻게 보면 원시인 내지 혹은 그 이후에 야만민족, 원시민족들에게 정치적인 부분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 하나? 그들은 정치적인 분쟁이 없었지, 정치 그 자체가 없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혜택이 누군가에겐 불리한 부분을 가져갈 수 있다. 정치라는 것은 조율에 가깝고, 불리한 입장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중에 엘렉트라 신화가 있다. 닥치고 정치를 읽다보면 박근혜 대표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분은 이른바 아버지를 국가로 하는 분이고, 게다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람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적용하기가 딱 좋은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엘렉트라라는 인물의 아버지는 아가멤논 왕으로 고대 그리스신화 전쟁인 트로이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가멤논왕은 전쟁을 위해 항해를 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죽여 신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아가멤논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충격과 분노에 휘말려 결국 자신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공모하여 아가멤논 왕을 죽이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엘렉트라를 가난과 추위에 헐벗게 하였다. 그리고 아가멤논의 왕의 복수를 꿈꾸던 엘렉트라는 자기 나라 멀리서 사는 동생 오레스테스와 공모하여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였다.

 

 

그 후에 오레스테스는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환청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올리푸스 신 중의 1명인 아테나 주관 아래 재판을 벌여 50:50이라는 공판으로 통해 죄를 사면받았다. 따라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신화처럼 인간의 죄를 가볍게 하고, 인간의 잘못을 인지하게 하여 앞으로 남은 인생을 다시 활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의 정치는 그것이 다르게 되었다. 과거에 비해 너무 사람들도 많아지고, 교류해야할 사회적 구성원 내지 외교적인 영역이 남아있었다.

 

 

특히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은 바로 정치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이 바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도이다. 이른바 좌우 이념갈등이란 점에서 깊이 공감을 보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책을 보면 저자 딴지총수가 1980년대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며, 본인이 읽었던 책이야기를 거론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 <공산당선언>, <자본>이란 도서이다.

 

 

사실 마르크스 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시초라고 하나, 이미 그 전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이나 개념이 벌써 유럽에 있었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런 이념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이론을 정립하고, 현실을 제대로 보아 사회구조를 분석하여 자본주의를 전도시키기 보다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보자고 한 것이다. 사회구조와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기본 이론과 사상조차도 등장하기가 어려우며, 나온다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정보와 관념으로 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좌파에서 좌파의 근본은 사실 마르크스부터 시작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와 같은 인물로 가는 것은 분명하나, 21세기가 와도 마르크스의 이론은 아직도 통용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좌파라는 존재에 대해 단순히 정치적인 지지도에 따른 좌우 분리로 이어진다. 닥치고 정치에서 딴지총수 김어준씨는 그런 점들을 간파했다. 김어준 총수는 마르크스가 어쩌고,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과 같은 학자나 사상가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재 그대로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정치라는 것에 대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정치를 이해하기에는 많은 부분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언급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미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철학, 미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학문이나 도서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까지 이 책에서 말하지 않는다.

 

 

명랑시민 정치교본이란 말처럼 내가 지적하거나 딴지총수가 간파하듯이 시민들이라 사람들중에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의 뒷면인 사상과 철학에 대해 깊이 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붙잡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치란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투표라는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정치적인 의결권을 표명 가능한 것은 오로지 투표이다.

 

 

고대 그리스처럼 직접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같이 모든 시민에게 정치적 참여권으로 정치체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물론 고대 그리스는 성인남성만 가능했다. 노예, 어린이, 이방인, 여성 등에게 투표권을 선사하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과 같은 자유국가라는 곳에서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20C 초반이란 점을 생각하면 정치참여권을 국민과 시민에게 제대로 부여함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민주주의 꽃이 선거의 투표권 역시 전체 투표행사권의 반조차도 권리를 제대로 표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감정기와 625전쟁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아픔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오는 가이다.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 전체주의적 사고방식 즉 파시즘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닥치고 정치에서는 한국의 정치를 보수보다는 보수가 아닌 보수가 집권하고 있다고 한다.

 

 

맞다. 그 말은 맞다. 이른바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위험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매카시즘은 미국의 상원의원 조지피 매카시라는 인물이 당시 1940~50년대 미국 정치계열에서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과 대치하고 있어서 이른바 자신의 정치세력에 부합하지 않은 인물을 소비에트 연방의 첩자나 동조자로 보고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하던 정치적 테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매카시즘이란 이데올로기가 한국과 일본에 수입되고, 특히 한국에서 빛을 발한다. 한국의 보수는 이른바 매카시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그것을 언급한다. 항상 북한과 문제는 어느 특정 정치세력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매카시즘이란 방법으로 자신들의 적을 제거하고, 국민들에게 폭력의 미학을 상기하는 파시즘으로 몰고 간다. 결국 전체주의적인 영역에 언론과 미디어까지 부합되면 국민들은 이미 자신들의 손에서 놀아난다.

 

 

그것에 대항하던 세력이 지난 세월은 민주화 운동 선봉자들이고, 이제는 매카시즘을 이용한 국민통제와 민주화 운동을 군사적 폭력에서 금전적 혹은 언론적인 폭력으로 강행한다. 그런 공간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의 폐단은 독점 기업의 상술을 지나 그룹 총수들의 불법 자금 횡령과 세금 포탈, 그리고 그것을 무마해주는 부패한 관료체계와 언론들을 말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소지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반사회적인 존재로 낙인을 찍으려 하는 사람이나 세력으로 몰고 간다. 그래도 계속 투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김어준 총수는 투쟁의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도 이야기했다.

 

 

투쟁을 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투쟁의 공간에서 뭐가 맞고 그른 것인가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김어준 총수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자신은 노제에 갔다가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버스 뒤편에 혼자 눈물을 흘리다가 이런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겠다고 말이다. 그는 봉하마을조차 가지 않으려 한다. 가면 마음이 매우 약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그의 정치적인 맥락은 단순히 과거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나 새로운 면을 보자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서 진보세력이 너무 딱딱하고 자신에게 갇혀있다고 했다. 일단 서구의 사상에 의한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들이 많았다. 우리가 학교수업이나 대학강의실에서 듣는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은 거의 좌파적인 인물로부터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배운다고 해도 그 원리나 체계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가는 것은 좋으나 투표권이 있는 시민과 국민들에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란 도서는 국내에서 총 5권이 넘는 도서로 페이지가 시리지를 합하면 3000페이지가 넘는다. 그 책에서는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읽기에 벅찬 글이다. 그의 글은 오히려 지식을 알고 있는 부르주아 내지 귀족들이 보고 납득할 수 있는 도서였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나 글을 귀족적이란 사실이다. 그래도 현재 노동운동이나 좌파운동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건재하다. 다만 그것이 정말 우리 같은 서민이나 약자에게 좋을망정 어떤 내용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대중정치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어준 총수의 큰 대안점이다. 물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어려운 단어보다는 쉽게 국민과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쉬운 말이 지지도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작년에 큰 히트를 쳤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전 국민인가? 그것을 십만명 이상 읽어도 치더라도 그것을 완독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인가?

 

 

정치적인 활동에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이다. 정치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누가 좋네 마네. 이게 좋아 싫어. 하지만 그 뒤에 넘어가면 수많은 담론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알고 가기 전에 기차와 버스는 떠나가는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바로 그런 준비되지 않은 국민과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보기 쉽고 재밌게 가려고 하는 정치서적이다. 정치란 사실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는 오로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찾아오는 온갖 이권과 혜택이다.

 

 

그저 멀리 외부서 관람하는 국민과 시민은 구경꾼이다. 즉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 쇼에 불과하고, 우리 국민과 시민들은 그 쇼에 열광하고 환호하는 방관자에 불과하다. 그 쇼는 계속 이어지고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쇼를 계속 관람할 것인가? 아니면 쇼를 바꾸어 볼 것인가? 닥치고 정치는 그런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정치를 새롭게 변화하려고 한다.

 

 

물론 그 정치적인 최종목적은 노무현의 신화를 뒤에 찾아오는 문재인 변호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김어준의 목표는 문재인 변호사의 대선에 집중된다. 스펙타클의 전복해도 다시 새로운 스펙타클은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을 소외하는 것인지 그 소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차이는 분명한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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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산업의 멸망
김인성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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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산업의 멸망은 겉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런 세계를 밝혀낸다. 사실 기술적으로 정치적으로 들어다보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바로 미디어의 세계이다. 미디어란 항상 인간이 접촉하고 다루고 느끼고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그 미디어에 대한 제작이나 전달, 유통과정은 일반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미디어의 세계에서 현대사회의 필수품이 컴퓨터와 핸드폰을 보자고 하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컴퓨터를 항상 업무에 사용하고, 전화기는 언제나 우리 인간의 손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소유하고 있다.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의 제작은 어느 특수한 기업이나 조직에서 독점하여 제작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에 보이지 않은 블랙박스이다.


사실 미디어의 독점이나 규제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이다. 가령 현대인의 통제는 국가권력에 의한 방법보다는 미디어로 통한 방법이 좋다고 한다. 미디어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익이나 사적인 영역까지 포함하여 제작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디어의 중심세계에서 들어나지 않거나 혹은 들어나 보이는 일들을 여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부분으로 기업의 심각한 독점과 반칙플레이였다. 미국 최고의 기업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이크로소프트사 즉 MS사의 경우 뉴스나 보도에서 인터넷 사용에 대한 독점으로 고소를 당하거나 또는 대표적인 컴퓨터 CPU 제작사인 인텔과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상대회사 부품을 사용하는 다른 업체에 대해 심각한 자금압박을 넣어 다른 회사의 물건을 이용할 경우 파산까지 이르게 하는 불공정 플레이를 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인텔이 불법적으로 어떻게 AMD를 비롯한 CPU 제작업체를 비겁하게 방해했는지 그 후에 얼마나 많은 금액을 보상했는지도 나온다. 하지만 그동안 인텔이 벌어들인 금액이나 그 금액만큼의 사회인지도를 생각하면 AMD 입장에서는 부당한 대우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도서 서평을 적는 본인만 하더라도 인텔에 대한 메이커 선호도를 가지고 있지 AMD사에 대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MS사의 인터넷 익스플로어에서 상대되는 네츠케이프 사에 대한 불공정 플레이, IBM 컴퓨터 제작사가 벌인 경쟁회사나 신생업체 죽이기에 대한 적나라함을 여기에서 고발한다.


정보는 홍수처럼 발생되고 있는 그 홍수를 만들어내는 하드웨어는 이미 가뭄처럼 말라버린 점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거기에 대항마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여전히 부당거래는 건재하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생각난다. 컴퓨터를 인간의 실용도구라고 하나 그 도구를 예술적으로 만들어 철학적인 관념까지 함유한 애플사의 경영자 말이다.


그의 내용에서 최근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할 때 아이폰의 위력이 새삼스럽게 위대하게 느껴졌다. 내손만의 컴퓨터, 그리고 많은 정보와 소통의 위력들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진절머리를 날 정도로 MS사, IBM, 인텔 등과 같은 업체와 싸워야 했다. 게다가 한국시장 판로개척에서는 조립품 컴퓨터라는 덫에 걸렸다. 그런데도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 정보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와 철학으로 지금의 스티브 잡스로 되었다.


그렇게 되는 과정도 대단하겠지만, 그 뒤에 숨겨진 폭력적인 상거래 역시 대단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고 있다. 다양한 콘텐츠로서 사람들은 자신의 즐거움과 이해력을 만족한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서비스나 혜택은 점점 줄어가는 것이다. 외국에서 검색엔진하면 구글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구글은 그렇게 유명세를 떨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의 정보사회는 독점과 규제, 제약, 횡포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통신의 기술 역시 발전하고, 얼마든 좋은 질의 미디어를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비싸지거나 기존을 고수하였으며, 데이터 전송량을 늘일 수 있어도 줄이는 방법으로 고객의 이익보다는 고객의 이익을 합법적으로 횡령한 것이다.


어떤 일이든 자신들만의 툴을 넣게 하여 고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정보유출과 같은 피해를 일으키고, 사건이 벌여져도 개선하기 보다는 임시적으로 입막음 방식을 선택하여 변화의 의지는 없다. 겉으로는 좋은 이미지를 부여하나, 그 이미지에 사람들이 매료되었거나 혹은 세뇌되어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제품의 문제나 서비스의 질을 따지는 게시물조차도 검열을 받게 되어 강제로 삭제 및 조회불가라는 우스꽝스러운 일가지 벌여진다. 소비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세계와 통신세계의 이런 독단적인 반칙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해진 것만 찾게 해야 하고, 그 이익은 어느 특정 기업과 그 기업을 봐주는 관료체제에게 돌아간다.


또한 미디어 하드웨어 관련하여 기능도 떨어지고 성능도 인정받지 못하는 제품들을 국민들의 애국심리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한다. 예전에도 한국 자동차는 수출용과 내수용은 서로 다르다고 들었는데, 내수용의 기능이나 성능이 매우 저하된 것도 모자라서 가격까지 비싸게 팔아넘김으로 국민들에게 폭리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런 보이는 부분에서 들어나지 않은 부분들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함은 항상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항상 우리가 접하고 있어서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생존을 위해 호흡을 하면 공기에 대한 존재성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론 앞에 아주 많은 덤프트럭이 과속으로 달려 매연이 나오는 도로가의 공기라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에서의 미디어세계에선 당연지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국·내외 대기업들의 부당한 거래와 반칙플레이, 기업을 봐주는 부패한 관료체제, 애국심리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는 기업들, 기술발전으로 요금이 저렴하게 할 수 있어도 그것을 거부한 채 계속 이익만 챙기는 공기업, 한국 IT 산업은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것을 두고도 숨어 있는 폭리추구주의자에 의해 병들어가 가고 있다. 결국 그것은 소비자의 권리와 재산을 침하하고, 더 나아가 자유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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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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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296에 나온 문구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경향들이, 사회 문제를 전부 이성적 논리로 규정하려고 하는, 하나의 사상으로 세계를 통일하려고 하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하나의 사상으로 모든 것을 해명하려고 하는, 근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이거든요?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는 제기했는데 답이 없다는 거죠.”

 

이 문구는 참고로 故 노무현대통령의 마지막 육성기록과 집필기록을 모아 그 후에 그가 서거할 때 발간한 도서이다. 진보의 미래라고 말이다. 진보의 미래란 말에서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 이원화된 구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여실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페이지 296에 문구가 인상이 깊다.

 

이전에 나도 이런저런 책을 보면서 사상, 철학, 이념 등 다양한 관념에 대해 혼자서 공부하려고 허둥거리고 있을 때 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들어가서 기존 사회의 문제를 알고 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노무현의 진보와 미래라는 점이다. 그의 진보와 미래는 모든 것을 급진적으로 변화하거나, 혹은 외부의 변화에 부동의 자세로 있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안고 가고, 새롭게 일어나가자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도자를 바꾼다고 달라지진 않는다.”에서 많은 공감이 일어났다.

 

지도자 한 명 교체되어도 나라 그 자체가 개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지도자를 뽑게 한 시민과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정치적 조직이 우선적으로 많은 영향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故 노무현대통령은 그런 점들을 이미 오랜 전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을 맡을 때까지 늘 이런 말을 들은 것 같다.

 

한쪽에서는 좌파대통령, 다른 한쪽에서는 신자유주의자 신봉자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좌파와 우파도 아닌 그 어디에 내놓아도 안주할 공간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중도를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분명 그는 진보적인 대통령이었다. 단지 그 진보적인 부분을 국제적 동향과 국내 여건을 배제하지 않았기에 보수적인 국가에서 진보를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앞길에 막히고 벽이 늘 가로막고 있었다. 역사는 한 번도 당신을 비켜가지 않음이 여전히 증명했다. 진보의 미래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깜짝 깜짝하고 놀랐다. 왜냐하면 그가 적어놓은 글을 보면서 故 노무현대통령이란 인물이 얼마나 많은 공부와 사유를 하고 있었나이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고전 철학자의 이름(장 자크 룩소), 최근에 등장하는 사회 및 경제학자(장하준 교수, 폴 크루먼, 자크 아탈리) 등 많은 대석학들의 책들을 꾸준히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생각난 철학자는 미국 위대한 현대철학자인 존 롤즈였다.

 

이전에 존 롤즈가 저술한 정의론이란 도서를 본 적이 있었다. 페이지가 600 이상 분량에 내용도 무척이나 어려웠으나, 그 정의론에서 본 내용이 故 노무현대통령이 저술한 진보의 미래에서 많은 합의점을 보았던 것이다. 정의론에서 존 롤즈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에 대한 연구도 하였겠지만, 그는 자신의 원하는 사회상이란 최소수혜자에 대한 초점이었다.

 

기회의 균등, 최소약자에게도 꿈과 미래를 줄 수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 물론 정의론에서 존 롤즈는 개인의 역량과 능력도 중시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성공, 성공에 따르는 부와 명예 역시 인정하였다. 단지 그 과정에서 그런 부와 명예를 (사회구조적으로) 박탈감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 그의 정의론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의 기회, 최소생존의 기회가 필요했다. 따라서 최소수혜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말로 인간이 재산이고 보물이라는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강력한 지도자가 나서서 하겠다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 독일 히틀러는 나치즘이란 극단적인 선택으로 통해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여 자국민을 모두 가난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그 병폐로 전쟁이란 큰 위협을 안겼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역량도 중요하다면 그 지도자를 제대로 지지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정치권에 대한 청구자들도 필요하다. 진보의 미래는 바로 “정치체제 대한 권리(에티엔 발리바르 도서 제목 인용)”를 올바르게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사실 故 노무현대통령도 지적한 것처럼 지도자만 바꾸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었듯 말이다.

 

전복해도 운영체계에서 과거와 별반 차이가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된 기로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시민들이 늘 깨어있기를 바라야 한다. 그것은 결국 교육의 기회이고, 교육은 누구나 받을 수 있을 공평성이 있어야 한다. 가난하거나 생계의 문제로 교육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결국 그 개인에게는 앞날의 보장 즉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으로 이어진다.

 

발터 벤야민이 자유라는 것은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의 차이로 인해 나누어진다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결국 가난에 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인 여건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경제적인 가난은 결국 그 개인에게 자유의 한도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교육이라는 점이다.

 

교육은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참여의식 증대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투자는 그것 자체가 사회적인 재력이 된다는 점이고, 차후에 국가 경쟁력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고 글을 적는 엔지니어 입장에서 故 노무현대통령이 말하는 기술전문 관료생성과 더불어 사회간접자본 충원은 곧 우리 사회를 더욱 튼튼하게 하고, 급변하는 세계정황에 크게 대응할 수 있는 밑바탕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바꾸어가야 한다. 현재로서는 과도기적인 상황이라 볼 수 없는 것 같다. 위에 명시한 것처럼 그는 중도적인 자세로 진보의 미래를 적어갔다. 보수든 진보든 어떻게 보자면 이 둘 세력은 결국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할 존재이다. 진보의 미래에서 정말 진보적으로 미래를 투영한다고 하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안이란 점들을 중시했다. 진보의 미래에서 진보는 진보 안에서 갇혀할 것인가? 아니면 보수로 돌아가자고 해야 하는 것인

가?

 

처음에 내가 인상 깊은 문구인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이 모든 것을 지적해도 대안 없는 둘 사이에서 방황하기보다는 둘 사이에서 다소 진보적인 관점으로 앞으로 나가려는 것이 故 노무현대통령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이 아프게도 한국에는 진정한 중도주의란 불가능한 모양이다. 중도는 양쪽의 공격을 받아야 그의 모습이 내 뇌리 속에 깊이 박혀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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