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2019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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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3. 공놀이 좀 해볼랑가



  어릴 적에 살던 마을은 야구장하고 가까웠습니다. 저녁에 야구장에 불빛이 환하면 우리 마을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때로는 야구장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대단했어요. 다만, 제가 나고 자란 마을은 전라도 아닌 인천입니다. 제가 늘 지켜본 야구장에는 ‘삼미 슈퍼스타즈’라고 하는 이름으로, 늘 꼬래비에서 허덕이며 ‘언제 안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나’ 싶은 기운이 흘렀습니다.


  오늘 저는 전라도에서 아이들하고 살아가는데요, 고흥 시골마을에서 야구를 보는 분은 없지 싶습니다. 괭이자루는 잡아도 공 치는 방망이를 잡을 일이 없겠지요. 그래도 인천에서나 전라도에서나 공을 치고받는 놀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매한가지라고 느끼면서 “자네, 공놀이 좀 해볼랑가?” 이야기를 적어 볼까 싶습니다.


 공을 치니께 야구요


  어릴 적을 떠올리면, 아무리 야구장 곁 골목집이나 기찻길집에 살던 동무라 해도 야구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오가지요. “야, 넌 야구도 모르냐? 야구장 옆에 살면서?” “야구가 뭔데?” “아이구 참, 공을 던지면 치는 거.” “공을 던지면 치는 게 야구라고? 그럼 공치기이네.” “‘공치기’하고 ‘야구’는 다르지.” “공을 친다면서? 공을 치면 ‘공치기’이지, 그게 뭐야.”


  생각해 보면 그래요. ‘야구’는 ‘野球’라는 한자로 적는데, 일본사람이 옮긴 한자말이겠지요. 영어로는 ‘baseball’이에요. 영어하고 한자말은 결이 다르지요. 영어라면 ‘깔개(base) + 공(ball)’이고, 한자말이라면 ‘들(野) + 공(球)’입니다. 어째 좀 엉성한 이름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그냥그냥 쓰지만, ‘공치기’라든지 ‘들공’이나 ‘들공놀이·들공치기’라 할 만도 하겠습니다.


 던지니께 투수요


  야구를 모르는, 그렇지만 ‘공치기’인 줄 알겠다는 동무를 불러서 한판 끼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놀이를 하자면 사람을 채워야 하거든요. 꽤 많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두 쪽으로 갈라 아홉씩, 모두 열여덟은 있어야 합니다. 이때 또 이런 말이 오갑니다. “근데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긴, 투수가 던지면 타자는 쳐.” “‘투수’는 뭐고, ‘타자’는 뭐냐?” “참 나, 하나도 모르는구나. ‘투수’는 던지는 사람이고, ‘타자’는 치는 사람이야.”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던지는 사람이 던지고, 치는 사람은 친다는 소리이네?” “그래, 투수가 던지면 포수가 받지.” “‘포수’는 또 뭐냐?” “포수는 받는 사람이야.” “야, 무슨 공놀이를 하는데 이렇게 말이 어렵냐? 도무지 못 하겠다.”


  웃기자고 늘어놓는 말이 아닙니다. 참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야구장 옆에 살지만 야구에는 도무지 마음이 없는 동무를 데려와서 끼우려니 참으로 골이 아파요. 아니, ‘공격·수비’란 말도, ‘1루·2루·3루·홈’이란 말도, ‘스트라이크·볼·포볼·아웃·세이프’라는 말도, 공치기가 낯선 동무한테는 모두 어질어질할 뿐입니다.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동무 말이 틀리지 않아요. 던지는 사람이라면 ‘던짐이’라 하고, 받는 사람이라면 ‘받는이’라 할 만합니다. 치는 사람은? ‘침이’는 좀 엉성하고, ‘때림이’쯤이면 어울릴까요?


 죽었나 살았나


  공을 치고받는 놀이를 처음 하려는 동무하고 나란히 앉아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같이 지켜보면서 하나하나 짚어 주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얼른 ‘송구’해!”란 말을 듣더니 ‘송구’는 또 뭐냐고 묻습니다. “‘던지라’는 뜻이야.” “던져야 하면 ‘던지라’고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냐?”


  타자, 아니 때림이가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누구는 ‘방망이’라 하고, 누구는 ‘배트’라 합니다. 섞인 두 말을 들은 동무는 또 묻지요. “‘방망이’는 뭐고, ‘배트’는 뭐냐?” “응, 둘 다 같은 걸 가리키는 말이야.” “같은 거라면서 왜 말이 다르냐구?” “그게, 하나는 영어이고, 하나는 우리말이야.” “뭔 공을 치는 놀이를 하면서 영어까지 다 써야 하냐. 우리말로는 못 하냐?” “난들 아니. 텔레비전을 보면 다들 두 가지 말을 써.”


  드디어 깡 소리가 나면서 공을 때립니다. 또는 칩니다. 통통 튀는 공을 받아서 던집니다. 어린이끼리 하는 공치기이니 으레 옥신각신합니다. “세잎이야!” “아니 아웃이야!” “아니야, 세이프라고!” “세잎!” “아우트!” 동무는 또 묻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어린이로서 ‘세입·세이프·세잎’하고 ‘아웃·아우트’란 말이 섞입니다. 게다가 “살았어!” “죽었어!” 같은 말도 섞여요. 동무가 묻기 앞서 손부터 살레살레 젓습니다. “공을 쳤으면 저쪽에 깔아놓은 천조각을 빨리 밟아야 해 …….”


 왼날개도 오른날개도 어지러워


  가만 보니 야구라 하는 공치기에 동무를 섣불리 끌어들일 수 없구나 싶습니다. 어쩐지 동무한테 미안합니다. 공을 쳐서 하늘로 뜨면 ‘뜬공’일 텐데 ‘플라이볼’이라고들 합니다. 공을 쳐서 땅을 구르면 ‘구름공(구르는공)’이나 ‘땅공’일 텐데 ‘땅볼·바운드볼’이라 합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포볼·볼넷’이라 섞어 쓰는 말도, 또 “들어왔어!” “안 들어왔어!” “스트라잌이야!” “볼이야!” 하고 섞어 쓰는 말도, 이밖에 이런저런 때에 쓰는 요런조런 말을 놓고서 머리가 핑핑 돕니다.


  같이 야구, 아니 공치기를 하던 동무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서 먼저 일어나기로 합니다. 야구장 옆에 살지만 야구를 모르는 동무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합니다. 둘이 터덜터덜 걸으며 조용합니다. 할 말이 없더군요. 저는 다른 동무들하고 으레 공치기를 했던 터라 공치기에서 쓰는 온갖 말이 어떤 말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서 그냥 썼어요.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썼지요. 바른 말 그른 말을 떠나, 한국말이냐 아니냐를 떠나, 왜 어떤 뜻으로 그 자리에 쓰는가를 제대로 짚는다거나 헤아린 적이 없구나 싶더군요.


  서로 처음 맞붙을 적에 외치던 ‘플레이 볼!’도, ‘좌익수·중견수·우익수’가 뭔지 풀이해서 알려주려던 말도, 어떤 어른이 왜 이런 이름을 붙여서 쓰는가를 참으로 그때까지 생각한 일이 없다고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어른들이 그냥 쓰는 말을 멋모르고 따라하면서 ‘전문 야구용어를 쓰니까 멋지다’는 마음, 이른바 겉치레에 빠져들고서 겉치레인 줄 몰랐구나 싶었어요.


 ‘체육’은 뭘까?


  학교에 ‘체육(體育)’이란 이름인 수업이 있습니다. 학교에 ‘운동장(運動場)’이란 이름인 너른터가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이런 이름을 곧이곧대로 외워서 쓰기만 했습니다. 가만 보면, 교사인 어른 가운데 이런 이름을 제대로 풀이해서 들려준 분은 없었지 싶습니다. 어른들도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이런 말을 그냥그냥 따라서 쓸 뿐입니다.


  몸을 가꾸거나 기른다면 ‘몸가꾸기’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움직이는 곳이라면 ‘움직마당’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할까요? 학교에서는 ‘몸가꾸기’라든지 ‘놀이마당·어울림마당’ 같은 이름으로 쉽게 고쳐서 쓸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전문말이라 하더라도 전문꾼 자리에 선 사람끼리 알아들을 말이 아닌, 전문꾼 아닌 자리에 있는 여느 사람 누구나 곧장 알아들으면서 어깨동무할 만한 말을 새롭게 생각하고 살펴서 하나씩 보듬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길이름(도로명)으로 사는터(주소) 이름을 바꾸었는데, ‘광주’란 이름도 ‘빛고을’로 바꿀 수 있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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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2. 실컷



  고흥읍에 볼일을 보러 가서 걷습니다. 세거리 한켠에 있는 밥집에 적힌 글월이 문득 보입니다. “무한리필(1인).” 우리 집 어린이는 이 글월을 못 알아봅니다. 적히기로는 틀림없이 한글이로되 ‘한국말’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집 어린이하고 “무한리필 고깃집”에 간 적이 없어서 이 말을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곳에 간 적이 있든 없든 ‘무한리필’이라는 글월은 어른들이 썩 잘 지어서 쓰는 말씨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설프거나 서툴거나 엉성하거나 어리숙하거나 얕거나 모자란 채 쓴 말씨라고 느껴요. 또는 깊은 마음이나 사랑이 없는 채 그냥그냥 쓰는 말씨라고도 할 만합니다.


 실컷 먹으렴

 마음껏 먹자

 얼마든지 먹어

 배불리 먹으렴


  조금만 생각해도 ‘무한리필’이란 말씨가 퍼지기 앞서 우리가 어떤 말을 썼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고깃집에서든 어디에서든 알맞을 뿐 아니라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마음을 나눌 만한 말씨를 헤아릴 수 있어요.


 먹고 싶은 대로 먹자

 먹고픈 대로 먹자


  가만 보면, 어느 풀그림에서 ‘무한도전’이란 이름을 써요. 끝없이 부딪힌다는 뜻으로 ‘무한도전’일 텐데, “끝없이 부딪히기”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짧게 네 글씨로 쓰고프다면 ‘끝장보기’이라 써도 어울립니다.


  어느 이름이든 처음부터 어울리거나 마음에 들 수 있어요. 때로는 쓰고 쓰면서 어울리는구나 싶거나 마음에 들곤 해요. 멋들어진 이름을 곧장 지어내어 널리 쓰기도 하지만, 수수하구나 싶은 이름을 지어서 쓰는데 시나브로 멋이 살아나면서 담뿍 사로잡히기도 해요.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요? ‘배불리’ 먹을 수 있어요. ‘실컷’ 먹거나 ‘마음껏’ 먹을 수 있어요. 고깃집에서는 “배불리 드셔요”나 “실컷 드셔요”나 “마음껏 드셔요” 같은 이름을 내붙일 수 있습니다.


 세거리·네거리·닷거리


  길거리는 한길로 곧게 나기도 하지만, 두 갈래로 퍼지기도 하고, 세 갈래나 네 갈래로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때에 저는 ‘세거리·네거리·닷거리’라 말해요. 셋으로 갈리니 ‘세거리’이고, 다섯으로 갈리니 ‘닷거리’예요.


  자동차를 얻어타서 함께 갈 적에도 으레 ‘세거리’나 ‘네거리’라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자동차를 몰던 분은 못 알아듣곤 해요. 그래서 ‘사거리·오거리’로 다시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말 ‘셋·넷·닷(다섯)’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우리는 한국말로 숫자를 세거나 거리를 읽는 눈썰미가 아직 없을까요? 길거리를 한국말로 읽을 줄 모르거나, 이렇게 읽는 깜냥을 익힌 적이 없는 셈일까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둘이라 ‘두길(이차선)’이라 하고, 길이 셋이라 ‘세길(삼차선)’이라 하며, 길이 넷이라 ‘네길(사차선)’이라 합니다. ‘두길·세길·네길’은 교통방송 같은 곳에서 쓸 수 없는 말씨일까요, 아니면 앞으로는 쓸 수 있는 말씨일까요?


  이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쓰는 ‘나들목’ 같은 이름은 1990년대가 저물 즈음 비로소 퍼져서 자리잡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영어로 ‘IC’나 ‘인터체인지’를 쓰는 분이 꽤 있습니다. 입이나 손에 붙은 말씨를 못 털어낸달 수 있고, 스스로 생각을 가누어 씩씩하게 새로운 말씨로 거듭나려는 몸짓이 못 된달 수 있습니다.


  꼭 이 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얽힌 삶하고 살림을 헤아리면서 이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몸으로 녹여낼 적에 스스로 마음이며 삶이며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 만합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을 두고 ‘가정부’나 ‘주부’란 이름을 그냥그냥 쓰는 분이 많습니다만, 가시내뿐 아니라 사내 스스로 집에서 살림하는 길을 걷는다면 이런 말씨를 하루아침에 털어낼 만하리라 여겨요. 생각해 봐요. ‘가정부·주부’는 가시내만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내가 집에서 살림을 한다면 이 이름이 안 어울릴 테지요. 그러면 어떤 이름을 쓰면 좋을까요?


  예부터 쓰던 ‘살림꾼’을 쓰면 되어요. 집에서 짓는 살림을 즐겁고 슬기로우며 사랑스레 마주할 줄 안다면, ‘살림꾼’이란 이름을 ‘살림님·살림지기’처럼 손질해서 쓸 수 있어요. 때로는 ‘살림순이·살림돌이’처럼 쓸 수 있고요.


 시골순이·시골돌이


  어느 책을 읽는데 ‘촌부’란 낱말이 나옵니다. ‘촌부’는 뭘까요? 사전을 살피면 ‘촌부(村夫)·촌부(村婦)’ 두 가지가 있네요. 한자를 달리 적으면서 두 사람을 가리킨다는데요, 시골에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또는 시골에서 지내는 아주머니 아저씨를 ‘촌부(村夫)·촌부(村婦)’라 가리키는 이름이 어울릴까요, 아니면 ‘할아버지·할머니’라 하거나 ‘아저씨·아주머니’라 할 적에 어울릴까요?


  때로는 ‘할배·할매’나 ‘할아방·할마씨’라 할 수 있겠지요. 고장마다 달리 쓰는 말씨를 살려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아저씨나 아주머니를 가리킬 만해요.


  글을 쓰는 분들은 글멋에 빠진 나머지, 몸으로 살림을 지으면서 입으로 나누던 수수한 말맛을 잊기 일쑤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고운 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골에 사는 사람을 두고 ‘시골순이·시골돌이’라 할 수 있어요. ‘촌년·촌놈’이 아니고 말이지요. 이와 맞물려 서울에서 사는 사람을 두고도 똑같이 ‘서울순이·서울돌이’라 할 만합니다.


 살림말


  책으로 배운 분은 곧잘 ‘생활어·생활언어’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쩐지 귀가 간지럽습니다. ‘생활어·생활언어’는 도무지 삶이나 살림이나 살갗에 와닿지 않아요. 어쩌면 삶이며 살림이며 살갗하고 동떨어진 말씨가 ‘생활어·생활언어’ 같은 모습이리라 느낍니다. 이런 말씨를 쓰는 분들은 삶하고 너무 먼 탓에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말을 느끼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나타내지도 나누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구나 싶어요.


  살림을 하면서 짓거나 쓰거나 나누기에 ‘살림말’입니다. 삶을 누리거나 짓거나 가꾸면서 쓰기에 ‘삶말’입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더 헤아리고 싶어요. 무엇보다 서로 사랑을 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면서 ‘사랑말’을 쓰고 싶습니다. 함께 짓거나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바라보면서 ‘꿈말’을 쓰고 싶어요.


  잘잘못을 가다듬거나 손질하는 ‘손질말(순화어)’이 있어요. 손질해서 써도 좋지요. 그런데 어떤 말을 이래저래 손질하거나 말거나, 언제나 밑바탕에는 살림하고 삶하고 사랑을 두어야지 싶습니다. 살림꽃을 피우듯 말을 하고, 삶꽃을 나누듯 말을 하며, 사랑꽃으로 잔치를 벌이듯 말을 하면 좋겠어요.


  일부러 멋스러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는 않기를 빕니다. 살림하듯 말을 해요.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말로 담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손길이며 눈길이며 마음길이며 발길이며 몸길이며 꿈길로 글 한 줄을 써요. ㅅㄴㄹ


숲노래 :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을 가꾸면서 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우리말 동시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같은 책을 썼다. hbooklov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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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0. 못 알아듣겠소만



  ㅇ이라는 매체에서 제 사진을 몰래 가져다가 쓰면서 그 사진이 마치 ㅇ이라는 매체 것인 듯이 다뤘습니다.


  자, 저는 두 가지 말을 썼어요. ㅇ이라는 매체가 “몰래 가져다가 썼다”는 말이랑 “저희 것인 듯이 다뤘다”고 했습니다. 이를 법으로는 “저작권 침해” 또는 “무단 도용”이라 하고, “성명표시권 위반”이라 합니다. 앞엣말은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들려줄 수 있으나, 뒤엣말은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요. 더구나 뒤엣말은 곁님도 못 알아듣습니다.


  제 사진을 몰래 가져다쓴 곳은 저한테 “잘못했습니다” 하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사과’를 하지 않았어요. 이때에도 두 갈래 말이 있어요. 아이들은 ‘사과’라는 한자말을 못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어른들이 으레 쓰니 그냥 따라서 쓸는지 몰라도 말뜻은 제대로 모르지요. 생각해 봐요. 아이들한테 ‘사과’란 ‘능금’이란 열매입니다. ‘능금’을 가리키는 ‘사과’도 한자말이지만, 먹는 열매인 ‘사과’는 누구나 알아들어요.


  아무튼 ㅇ매체하고 전화로 얘기를 할 적에 물어봤지요. “잘못을 한 줄은 아십니까?” 하고요. 이때에 그곳 기자는 “좋은 뜻으로 썼는데…….” 하고 대꾸합니다. 이런 대꾸를 들으며 매우 어이없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하구나 싶었습니다. 좋은 뜻이라면 거꾸로 그 매체에서 쓴 글이나 사진을 제가 마음대로 가져다가 몰래 써도 되려나요?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요. 그 매체에 깃들어 일한다는 변호사 한 사람이 저한테 누리글월을 띄웠는데, 이 누리글월은 꼭 한 줄짜리입니다.


* 회사 내부 품의로 인해 금액 지급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는 이런 말을 쓰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했습니다. 이러니 여느 사람들이 법하고 얽힌 일이 생기면 매우 힘들어하는구나 싶더군요. 왜 이 나라 법마을은 잔뜩 부풀리는 한자말을 즐겨쓸까요?

  그런데 ‘품의’란 뭘까요? 이 변호사한테 맞글월을 띄워 ‘품의’가 무슨 뜻인지 물었으나 다시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 스스로 사전을 뒤적이기로 합니다.


 [품의(稟議)]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의논함


  ‘품의’란 한자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는 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변호사는 저한테 이런 한자말을 끼워넣은 누리글월을 띄웠을 테지요.


  자, 곰곰이 생각해 봐요. 웃사람한테 어느 일을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하고 말을 걸 적에 가리키는 높임말이 있습니다. 바로 ‘여쭈다·여쭙다’입니다. ‘품의’ 뜻풀이에도 ‘여쭈어’라는 대목이 나와요.


  예부터 웃사람한테는 ‘여쭌다’ 하고, 또래나 손아랫사람한테는 ‘묻는다’ 합니다. 법마을에서도 ‘여쭈다·여쭙다’를 쓰면 될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쓸 적에 아름다이 어깨동무를 하는 터전을 이루리라 봅니다. ‘여쭈다·여쭙다’가 아닌 ‘품의’를 써야 높임말이 되지 않습니다. ‘품의’를 써야 법마을다운 말씨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앞서 《타인을 안다는 착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책이름은 영 엉성하구나 싶습니다. 이렇게밖에 설익은 이름을 붙이나 싶어 아쉽습니다. 이러면서 생각했어요. 저라면 책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하고요.


 남을 안다는 설눈

 이웃을 안다며 설치기

 너를 안다며 설치다


  내가 아닌 사람은 ‘남’입니다. 나랑 맞댄다면 ‘너’입니다. 가깝게 여기고 싶으면 ‘이웃’입니다. 구태여 ‘타인’ 같은 한자말은 안 써도 좋습니다.


  다음으로 ‘설-’이란 말씨를 떠올립니다. ‘설익다’나 ‘설미지근하다’나 ‘설되다’나 ‘설자다’란 말이 있어요. ‘설다’에서 앞머리를 뗀 말씨예요. 제대로 되거나 있거나 하지 못하거나 않을 적에 ‘설-·설다’를 써요. 제대로 생각하지 않거나 바라보지 않는다면 ‘설생각·설살피다’나 ‘설눈·설짓’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설눈으로 본다거나 설짓을 일삼을 적에 ‘설치다’라 해요.


  ‘설-’을 붙이는 말씨를 새롭게 생각하노라니, ‘살-’을 붙이는 말씨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살-’을 붙인 낱말로 ‘살얼음·살얼음판’이 떠오릅니다. ‘살얼다’라 쓰는 분이 드문드문 있으나, 사전에는 이 낱말이 올림말로는 없습니다. “살짝 얼다”는 뜻으로 ‘살얼다’를 다룰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바탕으로 “살짝 보다”를 ‘살보다’라 하거나, “살짝 읽다”를 ‘살읽다’라 할 만해요. 맛보기를 하듯 살짝 먹을 적에는 ‘살먹다’라 할 수 있어요. 낱낱이 듣지는 않지만 가볍게 듣거나 살짝 들으니 ‘살듣다’라 할 수 있고요.


  살짝 읽으니 ‘살읽다’라면, 어설피 읽으니 ‘설읽다’입니다. 살짝 들으니 ‘살듣다’라면, 어설피 들으니 ‘설듣다’예요.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씨라 하듯, ‘살-·설-’을 사이에 두고 요모조모 쓰임새가 맞도록 여러 말을 즐겁게 지을 수 있어요. 밑글을 가볍게 쓸 적에는 ‘살쓰다’요, 글을 썼다지만 영 어설프다면 ‘설쓰다’입니다. 가볍게 맛을 본 ‘살먹다’라면, 어설프게 먹어 맛도 모르겠고 배도 고프다는 ‘설먹다’가 되어요. 가볍게 ‘살웃음·살웃다’라면, 웃는지 우는지 영 아리송한 ‘설웃음·설웃다’가 되어요.


  ㄷ이란 일터에서 ‘내부고발’을 했다는 분이 여러 해째 모질게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못이 바로잡히기를 바라면서 속얘기를 밝혔다는 그분은 끔찍하도록 들볶인다고 해요. 나라를 다스리는 꼭두머리를 갈아치워도 이런 일은 끊이지 않는다니 안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이웃님은 ‘내부고발’이 아닌 ‘공익제보’를 했다고 말해야 올바르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렇지요. ‘공익’을 바라는 목소리를 냈다고 여겨야 알맞겠지요.


  한 가지 일을 놓고서 바라보는 눈이 달라요. 이러면서 우리가 쓰는 말도 다릅니다. 꾸밈없이 밝히거나 보여주는 말이 있다면, 뭔가 가리거나 꿍꿍이를 담은 말이 있습니다. ‘내부고발’하고 ‘공익제보’는 서로 어떤 목소리일까요?


  그런데 있지요, 두 가지 말 모두 아이들한테는 어렵습니다. ‘공익제보’로 쓰면 한결 낫기는 할 테지만, 아이들 자리에서 보면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무엇을 나타내는지 헤아리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참소리. 참말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참되지 않다면, 이는 거짓모습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참모습을 모르는 채 거짓모습을, 이른바 허울이나 껍데기만 본다고 할 만합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참모습을 늘 지켜보거나 알 테지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는 참모습을 밝히는 목소리라면 ‘참소리’라 할 수 있어요.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환히 드러내려는 목소리를 ‘참소리’라 하면 어떠할까요? ‘내부고발’이나 ‘공익제보’를 이런 말씨로 담아내면 어울릴까요?


  아이들하고 함께 나눌 말씨를 헤아리니, 저라면 ‘참소리’나 ‘참말’이란 낱말을 쓰겠습니다. 때로는 ‘참외침’이나 ‘참뜻’이나 “참을 밝히다”라 할 수 있어요. 어른끼리만 나눌 말이 아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말을 쓰고 싶습니다. 못 알아듣겠는 어른 무리 말씨라든지, 슬픈 떼거리 얄궂은 말씨는 땅에 파묻어 거름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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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9. 집



  ‘장수’라고만 말하면 전라도에 사는 사람은 ‘전라북도 장수’를 먼저 떠올리지 싶습니다. 이다음으로는 “오랫동안 산다”는 뜻을 가리키는 한자말 ‘장수(長壽)’를 떠올릴 테고요. 그런데 사전을 살피면  “≒ 노수(老壽)·대수(大壽)·대춘지수·만수(曼壽)·만수(萬壽)·수령(壽齡)·영수(永壽)·용수(龍壽)·하년(遐年)·호수(胡壽)”라고 해서 비슷한말이라는 한자말이 잔뜩 뒤따릅니다. 지난날에 한문으로 글살림을 가꾼 분은 이렇게 갖은 한자말을 썼겠지요. 그러나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아서 쓸 만한 낱말은 하나도 없지 싶습니다. ‘장수’란 한자말조차 ‘오래살다’로 고쳐쓰면 그만입니다. ‘길게살다’나 ‘널리살다’나 ‘튼튼살다’처럼 오늘날 우리 살림살이를 헤아려 새롭고 재미난 말을 얼마든지 지어서 쓸 만하지요.


  사투리란, 우리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삶을 가꾸다가 문득 새로 지은 말입니다. 이러다 보니 사투리는 고장마다 다를 뿐 아니라, 고을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다른데다가, 집집마다 달라요. 사투리가 이토록 다른 까닭은, 고장이며 고을이며 마을이며 집집이며 살림이 다 달라서예요. 다 다른 삶맛을 담아낸 말이니, 어느 곳 사투리를 들어도 맛깔나요. 다 다른 살림멋을 길어올린 말이기에, 어느 곳에서 어느 사투리를 들어도 재미있고 알차며 구성지고 신이 나기 마련입니다.


  ‘마병’이란 오랜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고물(古物)’이지요. 우리 스스로 오랜 살림을 가꾸는 길이었으면 ‘마병장수’라 했을 테고, ‘마병집·마병가게’라 했겠지요. ‘고물장수·고물상’이 아니고 말이지요.


  영어 ‘홈페이지’를 그냥 쓰는 분이 많지만, ‘누리집’이란 이름이 어엿이 있습니다. 누리그물로 들어가서 찾아가는 데가 누리집이에요. 누리판에도 집이 있다는 생각이 참 대단해요. 다시 말해서 ‘집’이라고 하는 오래된 낱말 하나를 오늘날에 새롭게 살려서 쓰니까, 이 쓰임새는 사전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 더 살피면 ‘어린이집’이 있어요. 어린이가 다니는 배움자리인데, 이곳이 ‘집’처럼 포근한 터전이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기도 합니다. 잘 생각해 봐요. ‘어린이집’이라 할 적하고 ‘보육원·보육시설’이라 할 적에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요? 어른들은 어린이한테 어떤 이름을 붙인 터전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이렇게 이어가 보면 집을 놓고서 ‘학교’라 하겠는지 ‘배움집’이라 하겠는지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학교’ 같은 이름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대로 쓰는 일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나쁘지는 않아요.


  그대로 써도 나쁘지는 않으니 학교를 그냥 학교라고들 할 텐데, 오늘날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삶을 즐겁게 배우면서 살림을 사랑스레 배우기를 바란다면, 어떤 이름을 붙인 터전을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물려주시겠습니까? 마치 집처럼 포근하면서 아늑한 배움자리라는 뜻으로 ‘배움집’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해요. 한자말을 한국말로 고쳐쓰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혀에 얹어서 소리를 내거나 손에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씨를 그릴 적에, 느낌이 환하게 살아나면서 즐겁게 노래처럼 또르르 구르는 이슬같은 이름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새말을 지을 적에는 ‘국어순화’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노래가 되는 이름’을 헤아려서 이렇게도 붙이고 저렇게도 지으면 되어요. 노래로 부르듯이 짓는 이름이니 억지로 꿰맞출 일이 없어요. 나긋나긋 상냥하게 부르듯이 짓습니다. 시원시원 씩씩하게 외치듯이 지어요.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가정’일까요, 아니면 ‘살림집’일까요? 우리는 ‘주택’에 살까요, 아니면 ‘집’에 살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가정’이라면 ‘가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살림집’이라면 ‘살림꾼’이나 ‘살림지기’나 ‘살림님’이나 ‘살림벗’이 있어요. 우리가 살림집에서 산다면, 우리 집 어린이나 푸름이는 ‘살림순이·살림돌이’랍니다. 가시내한테 집일을 도맡기는 얼거리가 아닌, 가시내랑 사내가 어깨동무를 하면서 같이 살림을 가꾸는 ‘살림벗’으로서 살림길을 열 수 있습니다. 자, 어떤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아직 해남이란 고장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해남에서 알뜰히 이야기꽃 한마당을 펼 수 있다면 그곳을 찾아가려고 생각합니다. 해남이라는 곳에는 여러 시인을 둘러싸고서 ‘생가’나 ‘기념관’이나 ‘전시관’이나 ‘문학관’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이름, 이른바 ‘생가·기념관·전시관·문학관’을 그냥 씁니다. 이런 이름이어야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 생각입니다. 어른들 가운데에서도 한자말로 된 지식이나 학문을 익힌 사람들 생각이지요. 다섯 살이나 열 살 어린이한테 이런 이름이 마음에 와닿을까요? 열다섯 살 푸름이한테도 그리 안 쉽거나 마음에 안 와닿을 만한 이름이 아닌가요?


  이름이란 어떤 지식이 있는 어른한테만 쉽거나 와닿는 결로 붙이기보다는, 어떤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거나 가슴으로 맞아들일 만한 결을 헤아려서 붙일 적에 서로 즐거우며 아름답지 싶습니다.


  생각해 봐요. 고정희 시인이나 김남주 시인이 살던 집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고정희 살던 집”이나 “김남주 살던 집”이라 하면 되어요. 문학관이라면 “고정희 글숲집”이나 “김남주 글숲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희 님이 쓴 글을 숲처럼 그러모은 집이란 뜻입니다. 이밖에 “김남주 살림숲집”이라 하면, 김남주 님하고 얽힌 살림길을 찬찬히 밝히면서 보여주는 집이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이 아니어도 “고정희 집”이나 “김남주 집”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일 만해요.


  집이에요. 오붓하게 오순도순 도란도란 즐거이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집입니다. 집이지요. 누구나 기꺼이 맞아들여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는 너른마당이 정갈하면서 고운 집입니다.


  집을 집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느 집이든 집답게 가꾸는 손길로 나아간다고 느껴요. 집을 집 그대로 바라보기에, 집살림이며 옷살림이며 밥살림을 스스로 정갈하면서 알뜰히 여미거나 맺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결을 이어서 말살림하고 글살림도 북돋우겠지요.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살림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살림꽃이 바로 말이에요. 기쁘게 주고받은 살림꽃이라는 말을 종이에 살포시 얹으니, 살림열매로 흐드러집니다. 글이나 책이란 살림열매라 할 만합니다. 살림을 고이 지어서 얻었기에 널리 나누는 열매가 바로 글이나 책이거든요.


  아침에 어느 책을 읽는데 ‘아수라장’이란 불교 한자말이 나옵니다. 사전을 뒤적였어요. 딱히 대단한 뜻이 없더군요. ‘싸움판’이라 하면 될 텐데, 불교라는 자리에서는 굳이 이런 이름을 쓸 뿐이네요.


  여기에서도 더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첫걸음은 ‘싸움판’입니다. 다음으로 ‘싸움마당’이나 ‘싸움터’예요. ‘싸움투성이’가 되기도 할 테지요. 마구 싸우면서 어지럽다면 ‘북새통·북새판’입니다. ‘북새마당’도 어울려요. 마구 싸워 어지러우니 ‘어지럼판’이자, 시끌시끌할 테니 ‘시끌판·시끌마당’입니다.


  밀이란, 말이 나오는 결을 살려서 술술 펴고 나누면 되어요. 꼭 어느 한 가지 말만 쓸 일이 없습니다. 삶을 이루는 터전을 바라보면서, 살림을 짓는 손길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말길이 저절로 트여요. 사랑을 하려는 눈빛으로 슬기롭게 마음을 밝히면 갖은 글길이 환히 열립니다.


  책을 사고파는 곳이기에 ‘책집’이 됩니다. 또는 책을 짓는 곳이기에 ‘책집’이에요. 책을 다루는 길을 가니 두 곳이 모두 책집입니다. 갈래를 더 나눈다면, 책을 사고파는 일이란, 책을 나누는 길이니, ‘책나눔집’이라 할 만하고, 책을 짓는 일이란, 책으로 생각을 짓는 길이라서, ‘책짓는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온 한자말이든, 미국에서 들어온 영어이든, 그냥그냥 써도 나쁘지 않아요. 아직 모르겠으면 그대로 쓸 노릇일 터입니다만, 살짝 짬을 내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생각해야 스스로 말을 지어요. 스스로 사랑하면서 생각해야 스스로 살림을 지으니, 우리를 둘러싼 모든 말, 예부터 사투리란, 바로 사랑어린 살림을 짓는 손길에서 스스로 기쁘게 지은 자취로구나 하고 함께 배우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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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8. 장문의 글



  요즈음 분들은 ‘긴글’은 잘 안 읽을까요? 손전화를 오래 손에 쥔 채 하루를 누리다 보니 ‘짧은글’에만 익숙한 채 조금이라도 ‘짧지 않다’ 싶으면 죄다 ‘길구나’ 하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이웃님이 저한테 글월을 띄울 적에 저도 맞글월을 띄워 줍니다. 때로는 다른 일을 하느라 깜빡 잊고서 글월을 놓치기도 합니다만, 바로 글월을 적든 뒤늦게 글월을 띄우든 마음을 기울여서 온힘을 다해 쓰려고 해요. 이러다 보면 이 수다 저 얘기가 넘치곤 하는데, 이런 제 맞글월을 받는 분들이 으레 이렇게 말합니다.


 장문의 글을 답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적마다 적이 어지럽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이 말씨가 요즈음 ‘관공서 말씨’이거나 ‘격식 말씨’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써야 마치 다소곳하거나 얌전하거나 상냥하다고 여기시는구나 싶은데요, 이런 말씨는 하나도 안 다소곳하고 안 얌전하며 안 상냥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씨일 뿐입니다. 이 말씨는 다음처럼 바로잡을 노릇입니다. ‘손질’ 아닌 ‘바로잡기’를 할 말씨예요.


 긴글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글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길게 얘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얘기 고맙습니다


  아직도 퍽 많은 분들은 ‘한자말(일본 한자말+중국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어내면 길어진다고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어내거나 손질하거나 옮기면 훨씬 짧고 단출하며 쉽습니다. 이러면서 부드럽지요.


  그도 그럴 까닭이 한국사람이 쓰는 말이 ‘한국말’이니까요. 오랜 옛날부터 한겨레를 이룬 사람들이 쓰던 텃말이 한국말인 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분이 뜻밖에 대단히 많아요. 한문·한자말이란, 임금과 지식인과 벼슬아치 몇몇이 주먹힘을 거머쥐면서 그들 웃자리를 지키려고 쓴 바깥말인 줄 제대로 읽어내는 분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쓸 적에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가를 거의 못 배웠다고 할 만합니다. 어른부터 한국말을 한국말다이 배운 적이 없이 입시공부만 하면서 대학바라기를 하며 자란 터라, 이런 어른이 닦은 사회라는 곳에서 흐르는 말은 ‘삶말, 삶이 숨쉬고 피어나고 자라고 고운 말’이 아니기 일쑤예요. 딱딱한 질서와 메마른 틀과 차가운 계급과 위아래 신분으로 갈린 말씨이기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이러한 ‘사회 어른’이 엮은 교과서를 읽는 어린이·푸름이는 삶말도, 사랑말도, 참말도, 슬기말도, 살림말도, 고장말도, 꿈말도, 믿음말도, 놀이말도, 일말도, 나눔말도, 고운말도 모두 못 듣거나 못 배우곤 하지요.


  한자말을 쓴대서 잘못일 수 없습니다. 한자말을 쓴대서 틀리거나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영어를 섞든 한자말을 섞든 그 낱말이나 말씨가 어떤 뜻이나 결인가를 제대로 짚고서 똑바로 다룰 줄 알 노릇입니다. 그리고, 한국말 아닌 한자말이나 영어는 바깥말이라는 대목을 깨달아, 바깥말로서 제대로 가르치고 배워야지요.


  앞서 “장문의 글”을 보기로 들었는데, 우리가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즐겁고 아름다이 배운 적이 있다면, 말뜻대로 고치는 글 말고 새롭게 써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들어 볼게요. 무엇보다 ‘장문 = 긴글’이니 “장문의 글”은 겹말입니다.


 넉넉한 말씀 고마워요

 넉넉히 들려준 얘기 고맙네요

 푸짐한 이야기꽃 즐거웠습니다

 푸진 글월 반갑군요


  글월을 주고받은 분이 서로 오랜 동무라면 말씨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몇 가지를 들어 볼게요.


 넉넉한 말 고마워

 넉넉히 들려준 얘기 고맙구나

 푸짐한 이야기꽃 즐거웠어

 푸진 글월 반갑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말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사람마다 다 다른 삶터에서 나고 자라면서 다 다른 꿈과 사랑을 키우고, 이를 다 다른 말씨로 담아내어 ‘다 다르면서도 다 같은 즐겁고 슬기로운 사랑이 꿈처럼 날개돋이를 하는 이야기’를 펼치는 말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아마, 아니지 싶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살펴도,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살펴도, 하나같이 너무 메마릅니다. 더욱이 말재주 부리기나 어려운 한자말로 논설·논술 펴기가 가득하고, 쉽고 부드러우면서 상냥하고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어깨동무를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꼭지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부디 거꾸로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생이 배워야 하는 교과서를 어른들한테 건네면서 ‘자, 이 교과서로 공부하세요’ 하면 배울 맛이 날까요?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쪼개어 객관식 문제를 내고, 말을 말이 아니게 뒤틀어서 논설·논술로 꾸미는 국어 수업은 삶말하고는 매우 동떨어집니다.


  앞서 보기로 든 “장문의 글”을 다시 고쳐 보겠습니다. 여느 동무가 아닌 마음으로 사귀는 벗님하고 주고받는 글월일 적에는 이처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긴글 좋다

 긴글 좋았어

 긴글 고맙

 반가운 긴글


  우리 삶터에서 바로잡을 곳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느 곳이든 제대로 손보고, 슬기롭게 가꾸며, 즐거이 북돋울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뜻이 같은 줄거리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 마음을 담아내면 스스로 즐겁고 서로 기쁜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길을 이제부터 열어야지 싶습니다.


  더 미루지 말 노릇입니다. 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어렵다면 ‘비정규 과목’으로라도 하루 빨리, 하루 정규 과목을 마치고 날마다 5분이나 10분 틈을 내어, 말을 말답게 가꾸거나 돌보면서 마음을 마음답게 살찌우거나 키우는 이야기꽃을 이 나라 어린이·푸름이가 듣고 익히도록 자리를 열어야지 싶습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모든 말은 마음입니다. 껍데기 아닌, 주파수나 파동이나 소리값이 아닌 마음입니다. 우리 숨결은 잘생기거나 이쁘거나 못생기거나 못난 얼굴·몸매가 아닙니다. 그렇지요? 우리 숨결은 껍데기인 몸이 아니요, 이 몸을 감싼 옷이 아닌, 몸을 입고 옷을 걸친 속에 깃든 넋이요 얼이자 마음이요 꿈이며 사랑이고 생각입니다.


  ‘마음속’이란 낱말을 제대로 읽고 느끼면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삶터와 배움터와 마을과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속을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손잡기를 바랍니다. 이제 가시내 누구나 마음껏 바지를 걸칠 수 있는 자유·민주·평화를 누리듯, 사내 누구나 신나게 치마를 두를 수 있는 자유·민주·평화로도 거듭난다면, 우리 삶터는 매우 재미나면서 웃음이 넘치고 아름다이 깨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바로 껍데기를 벗어야지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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